[팩션소설'블러핑'78] 최규호는 김중필에게 대통령이 될 것을 제안

[팩션소설'블러핑'78] 최규호는 김중필에게 대통령이 될 것을 제안

저스트 이코노믹스 2025-01-08 04:20:00 신고

3줄요약
삽화=윌리엄리
삽화=윌리엄리

1979년

12∙12 군사반란

 육군 보통군법에서 10∙26 사건 5차 공판이 열리던 12월 12일, 전두필과 노태웅이 주도하는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필을 중심으로 한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는 전두필의 육사 11기 동기들을 주축으로 서로를 밀어주며 군부 내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전두필은 정보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했다.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경호실의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 동시에 제거되면서 국군 보안사령부가 유일한 정보기관이 되었다. 모든 정보는 보안사령부로 집중되었고 이것은 전두필의 세력을 막강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전두필은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기 때문에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군검찰 등 모든 정보, 수사 기관들을 지휘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필은 독점한 정보력과 수사력을 이용해 정치인들의 비리를 캐내고,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조작하는 등 정권을 잡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전두필과 하나회는 정승화 총장보다 한발 빨리 움직였다.

 하나회는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전두필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시해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와 한 패였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구실을 만들고,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드디어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회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장세남 대령이 단장이던 경복궁 옆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하였다.

  30경비단에 모인 3공수 여단장 준장 최수창과 5공수 여단장 준장 장기옥, 1공수 여단장 박희동 준장은 전두필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들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부대로 신속하게 돌아갔고, 30사단 관할이던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 다리는 수경사의 통제 하에 있었다.

  1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 점령, 3공수여단은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5공수여단은 효창운동장으로 출동하여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두필은 공수여단 외에도 노태웅이 이끄는 9사단 소속 1개 대대와 제2기갑여단의 15전차대대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9사단은 대한민국 최전방 병력으로 평시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에게 있었기 때문에 한미 연합군사령관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만 가능했지만 전두필은 그 절차를 무시했다.

 박종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으로 한국은 엄청난 혼란 상태에 있었고, 언제 북한이 남침할지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전방 병력의 상당 부분이 쿠데타에 참가한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노태웅의 전방 병력 동원은 노태웅이 전두필 다음으로 대통령이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 3, 5공수여단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인천에 있는 9공수여단이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지시로 서울을 향해 출동했다는 급보가 보안사에 전해졌다. 전두필 쪽 장성들은 아연실색했다.

 9공수 여단이 경인고속도로로 진입하면 1시간 이내로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공수 여단장 준장 윤흥기가 육사가 아닌 갑종 간부후보생 출신이어서 미리 포섭하지 못했다.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있던 유호성 중장과 황영국 중장은 육군본부 측에 전화를 걸어 '서울 한복판에서 아군끼리 서로 전쟁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도 더 이상의 무력 동원은 안 할 것이니 9공수를 원대 복귀시켜라'라고 설득을 하였다.

 육군본부 수뇌부들도 호시탐탐 김일성이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 도심에서 전투를 벌이는 참극만은 피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육본은 하나회와 전두필 측의 움직임이 명백한 쿠데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육본에 반란군으로 찍힌 상황에서, 하나회는 북한이 쳐들어오든, 9공수 여단이 서울에 먼저 진입하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기는 매한가지였고, 오히려 육본에 지는 것보다 북한군이 내려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는 주한미군을 믿은 면도 있었다.

 거기에 아침까지 장악을 못하면 국민의 여론도 쿠데타를 반대할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하나회를 경계하는 해군과 공군, 해병대, 후방 부대들과 주한미군조차도 육본에 동조할 가능성이 컸다.

 결국 육군본부 수뇌부는 쌍방 간에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전두필의 제안을 아무런 방책도 없이 수락했다. 최고 지휘관인 육군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은 9공수 여단장 윤흥기 중장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였고, 윤 준장은 병력을 부천에서 회군 시켰다.

 그러나 전두필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육군본부 수뇌부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1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특전사령부는 3공수여단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15대대장 박준규 중령에 의해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단신으로 사령관을 지키다가 사살당하고 말았다.

국방부로 도망을 간 노장현 국방부 장관은 반란군에게 순식간에 국방부가 점령당하자 비굴하게 반란군 편에 섰다.

 그때,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전두필과 일당들을 체포할 작전을 김기택 참모장에게 지시한다.

 “전차를 선두에 서게 하고 수경사 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투조로 편성하고, 경복궁과 보안사령부를 공격 목표로 정한다.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차포, TOW 대전차포 등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화력으로 2개 목표를 동시에 타격한 후, 반란군을 진압한다.”

 수경사령관의 명령을 듣고 깜짝 놀란 윤성민 참모차장이 장태완 사령관을 말렸다.

 “마지막으로 3군사령관에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아군끼리 유혈 사태만은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출동이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전차와 병력이 집결한 연병장으로 다가가자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다급히 무전 내용을 전한다.

"사령관님, 30경비단의 전차대대 본부에서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리 사령부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 있는 전차 4대로는 역부족입니다. 이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전차 무전을 확인한 장태완 사령관은 낙심하여 병력들을 해산시키고 사령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노장현 국방부 장관의 전화가 온다.

“피를 흘려서는 안 돼. 병력을 철수시키고 여기에서 상황을 끝내도록 해."

 이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곧바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호 중령이 헌병대를 이끌고 장태완 사령관과 수경사로 피신 온 육본 지휘부를 모두 체포했다.

쿠데타가 성공한 순간이다.

 노장현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최규호 대통령도 결국 재가했다.

작전 개시 약 10시간 만에 반란이 성공했다.

 박종희의 밀명으로 만들어진 박종희 친위대인 하나회가 전두필에게 송두리째 넘어갔다. 전두필과 하나회의 세상이 온 것이다.

 특전사 외에도 서울을 방위하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 부대들인 30경비단의 장세남 단장, 33경비단의 김광영 단장, 헌병단의 조필 단장,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인호, 작전 과장 고창승 등 모두가 하나회 멤버였다.

 쿠데타의 결정적인 성공 요인은 전두필이 사령관이었던 보안사령부가 국군의 모든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정보가 각 부대에 소속된 보안부대를 통해 속속들이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회가 진압군의 정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육사 11기를 포함한 하나회 세력은 공수여단장, 전방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북한군과 최전선에서 싸우게 될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별 다른 조치를 할 수가 없었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김중필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최규호는 김중필에게 대통령이 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선제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던 김중필은 이를 거절했고, 결국 전두필에 의해 부정 축재자로 낙인찍혀 정계를 떠났다.

 박종희 대통령의 이인자였고 군 선배였던 김중필은 신군부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전두필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정승화 총장,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 문홍구 작전 본부장 등을 김재규에 대한 내란방조죄로 구속 입건하였고, 육사 11기인 전두필보다 기수가 앞선 장성들 상당수가 전역했으며, 96명의 육군 장성이 하나회 멤버로 물갈이가 되었다. 이로써 하나회가 군 요직을 완전하게 장악했고, 전두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되었다.

[팩션소설'블러핑'79]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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