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사람들은 한국 시민들이 민주화 시대를 살고 있는 줄 알았다. 윤석열, 그리고 그와 손잡은 장군들이 벌인 뜬금없는 12.3 친위 쿠데타(내란)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윤석열 일당의 거사 음모가 워낙 엉성했던 요인도 있지만, △계엄군을 막아선 여러 민주시민들, △현장에서 '당나라 군대'처럼 태업을 한 계엄군 병사들, △국회 담장을 넘어 가 계엄해제 결의를 이끌어낸 정치인들의 발 빠른 대응이 서로 어울려 계엄 소동을 막아냈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12.3 계엄이 선포됐다는 뉴스를 듣고 '이게 실화인가' 갸우뚱하며 여의도 국회 앞으로 가봤다. 벌써 많은 시민들이 모여 '계엄 해제'를 외치고 있었다. 계엄 2시간 뒤인 12월4일 새벽 1시 국회에서 해제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회 앞 도로는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옆에 서있던 노인 한 분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철수하는 장갑차를 시민들이 에워싸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그저 명령에 따라 출동했을 뿐인 군인들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을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100년 전 실패한 히틀러 폭동 떠올리는 '윤석열 쿠데타'
그런 역사의 한 현장을 지켜보면서, 1세기 앞서 히틀러의 실패한 뮌헨 쿠데타가 떠올랐다. 아울러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 초법적 권력을 휘둘렀던 비밀경찰(게슈타포)이 떠올랐다. 윤석열 일당이 내란의 승자가 됐다면, 21세기 '한국판 게슈타포' 요원들이 지금쯤 설치고 다닐 것이다. 윤석열 쿠데타의 기획자로 알려진 김용현 국방장관은 그의 비선 측근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안산 롯데리아 회동 뒤 붙은 별명은 '버거 보살')에게 힘을 쓰는 직책 하나를 내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부터 딱 101년 전인 1923년 11월8일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폭동이 일어났다. 나치 돌격대원 600명이 기관총과 소총을 들고 히틀러의 지휘 아래 일으킨 무장 봉기였다. 그날 밤 8시30분 프록코트를 차려 입은 히틀러는 천장을 향해 권총을 쏘면서 '국민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했다. 다음날 아침 히틀러는 2,000명쯤의 무리를 이끌고 무장 행진을 시작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베를린. 그곳까지 가서 정권을 접수한다는 야무진(?) 망상을 품고 말이다(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2년 10월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밀라노에서 로마로 행진하면서 권력을 틀어쥐었다. 그 1년 뒤 히틀러는 무솔리니 흉내를 내려했던 셈이다).
하지만 뮌헨 폭동은 허망한 꿈으로 끝났다. 무엇보다 독일 경찰과 국방군이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았다. 무장경찰대가 히틀러 일당을 막아서면서 짧은 총격전이 벌어졌고, 23명이 죽었다(나치 당원 19명, 경찰 4명). 히틀러 가까이에 있던 헤르만 괴링은 총상을 입고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괴링이 마약 중독자가 된 것은 부상 치료를 위해 마약을 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1세기 전 히틀러의 망상은 이즈음 윤석열의 망상을 떠올린다. 히틀러가 어설픈 폭동 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붙잡혔듯이, 윤석열과 그의 측근(이른바 '윤석열의 장군들')은 치밀하지 못한 친위 쿠데타를 꾀하다가 그야말로 제 눈을 찌르고 말았다. 뮌헨 폭동 뒤의 히틀러처럼, 윤석열도 추운 감방에 곧 갇힐 판이다. 그와 손을 잡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던 '윤석열의 장군들'은 이미 감옥에 가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구른다?
흔히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구른다"는 말들을 한다. 이 말 속엔 우리 인간의 역사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발전할 것이란 낙관론이 배어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1923-2006)은 그런 낙관론은 틀렸다고 손사래를 쳤다. "인간 역사엔 비합리적인 요소가 많고 따라서 그저 우상향으로 흘러가진 않는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장이었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소련군 포로가 된 뒤 벌목공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개인적 체험이 그의 역사 인식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코젤렉은 현대인들이 많이 쓰는 119개의 주요 단어, 이를테면 민주주의와 독재, 보수, 반동, 진보, 자유, 근대, 역사, 법과 정의, 윤리 도덕, 전쟁, 문화, 역사 등의 개념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살펴봤다. 이른바 개념사(Begriffsgeschichte) 프로젝트다. 한국어 번역본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 참조 바람).
굳이 코젤렉의 어려운 얘기를 빌릴 것도 없다. 역사는 큰 흐름으로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만, 늘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 과학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크게 늘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독일이나 일본, 베트남전쟁 때의 미국 같은 이른바 '문명국'들은 전쟁에서 민간인 대량살상을 마다하지 않았고, '민족 번영'이니 '자유 수호'니 하며 그럴 듯하게 선전하곤 했다. 그런 야만의 시기마다 인류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뒤로 물러났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나치 히틀러 시대가 특히 그랬다.
히틀러, "의회는 필요할 때는 총검으로..."
히틀러의 독일과 상황은 다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도 지금 역사발전이 멈추는 위기를 맞고 있다. 12.3 친위 쿠데타(내란) 음모를 둘러싼 진통 속에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어 갈등하는 모습이다. 히틀러는 뮌헨에서의 어설픈 무장 봉기가 실패한 뒤 감옥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페스트균을 없애버리기 위해선 용서 없이 군대의 모든 무력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은 해산시켜야 했다. 의회는 필요할 때는 총검으로 본심으로 돌아가게 하되, 가장 좋은 방법은 당장 폐지시키는 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2014, 297쪽).
뮌헨 폭동으로 금고 5년형을 받은 히틀러는 감옥에서 <나의 투쟁>(Mein Kampf, 1925년 초판)을 급히 써내려갔다. 위에 옮긴 글은 그가 왜 폭력적으로 권력을 탈취하려 했는가를 강변하고 있다. 20세기가 낳은 괴물 히틀러는 유대인을 비롯해 그가 점찍은 적대세력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 했다. <나의 투쟁>에는 윗글처럼 히틀러의 위험한 생각들이 거칠게 담겨 있다. 책의 두께는 두껍지만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으로 읽는 이의 인내심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궤변 모음집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히틀러의 위험한 발상은 궤변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9개월 동안의 짧은 징역살이 뒤 풀려난 히틀러의 나치당은 급격히 세력을 불렸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어려운 경제, 특히 1929년의 세계대공황으로 비롯된 독일경제 파국은 히틀러 일당에겐 반사이익을 안겼다. 1933년 1월30일 권력을 잡자 히틀러는 곧바로 독재체제 구축에 나섰다.
총리에 오른 지 1달도 채 안 돼 일어난 (누가 뒤에서 부추겼는지, 그 진상이 석연치 않은) 제국의회 방화사건(1933년 2월27일)을 구실 삼아 정적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곧 이어 비상사태임을 내세워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수권법(授權法, 1933년 3월24일)으로 독재의 길을 닦았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 그리고 히틀러 자신의 패망이었다.
위에 옮긴 "의회는 필요할 때는 총검으로..."라는 히틀러의 폭력 선동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주 비슷한 이즈음 상황을 떠올릴 것이다. 다름 아닌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내란) 선포 뒤 나온 여러 모습에서다. "아직도 못 갔냐, 뭐하고 있냐, 총을 쏘고라도, 도끼로 부수고서라도 들어가서 끌어내라." "군인 4명이 1명의 의원을 들쳐 업고 나오라고 해." "계엄 해제돼도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는 거니까 계속 (의원 체포를) 진행해라."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겨냥해 무장 군인들이 출동시켰던 윤석열이 거칠게 내뱉었던 말들은 훗날 역사가들이 '한국 민주주의 흑(黑)역사'의 한 대목으로 기록할 게 틀림없다.
고문을 보는 것 자체가 고문
베를린 시내 중심가에 있는 부란덴부르크 문 남쪽 1km쯤 떨어진 곳에는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로 악명을 떨쳤던 게슈타포(Gestapo)와 친위대(SS) 본부 건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터에 2010년 역사박물관이 하나 들어섰다. 독일의 어두운 과거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의 이름은 '공포의 지형학'(Topography of Terrors).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숱한 고문과 악행의 실상이 시각적 자료로 잘 정리돼 방문객들을 맞는다.
지난날 게슈타포 건물 1층에는 수감자 50명을 한꺼번에 가둘 수 있는 커다란 감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의 전기 조명은 흐릿했다. 위쪽 창살을 거쳐 들어오는 실금 햇빛으로는 사람 얼굴을 겨우 알아볼 정도로 실내는 어두웠다. 바로 그 방에서 게슈타포의 마구잡이 폭력과 고문이 이뤄졌다. 여러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행해지는 고문과 그에 따른 끔찍한 비명 소리는 다른 이들에게도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작가 루퍼트 버틀러가 전하는 한 수감자의 증언을 들어보자.
[감방에서 심문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들은 교대로 수감자들을 구타했고, 폭행은 몇 시간씩 이어졌다. 동료 한 명이 구타당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고문은 점점 심해졌다.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죄는 (금속)틀과 주릿대(두 다리를 묶은 뒤 다리 사이에 넣는 굵은 막대기)를 사용했고, 손톱 밑에 못을 박아 넣었다](루퍼트 버틀러, <게슈타포: 히틀러 비밀국가경찰의 역사>. 플래닛미디어, 2011, 121-122쪽).
게슈타포의 고문 실상은 끔찍했다. 직접 겪어보거나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문이 바로 그곳 감방에서 공공연히 벌어졌다. 고문 받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자백을 더 받아내 될수록 많은 공범자를 붙잡을 요량으로 물고문, 전기고문이 잇달았다. 고문으로 정보를 다 캐냈다고 여겨지면, 초죽음이 된 수감자를 교도소나 수용소로 옮겨 끝내 죽게 만들었다. 살아남더라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다.
게슈타포 고문이 낯설지 않은 까닭
위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은 언제 어디선가 들었던 익숙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지난날 박정희․전두환 독재 아래서 여러 사찰기관들(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등)은 이른바 '반체제 용의자'를 붙잡아 무자비하게 고문했었다. 1987년 1월14일 용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은 그 숱한 고문 희생자들 가운데 하나다.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고문마저 마다하지 않았던 야만의 시대를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위의 게슈타포 고문이 그리 낯설지 않다(1월18일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38주기 박종철 추모제가 열린다).
그런 야만의 기억을 이젠 '과거사'로 여기고 21세기 민주화 시대를 살아간다고 믿어온 시민들에게 이즈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다름 아닌 12.3 내란과 관련한 고문 이야기다. 내란을 꾀한 핵심 기획자의 한 사람인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선거 부정 음모론에 빠진 나머지 엄청난 무리수를 두었다. 12.3 내란 이틀 앞서 가졌던 안산 롯데리아 햄버거집 회동에서 노상원은 후배인 현직 정보사령관과 두 명의 대령에게 이렇게 큰소리쳤다. "노태악이는 내가 확인(심문)하면 된다. 내 사무실에 야구 방망이를 갖다 둬라. 몽둥이로 족치면 다 불게 돼 있다."
노상원이 말하는 노태악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가리킨다. 문제의 노상원은 성폭력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불명예제대를 한 예비역 소장이다. 민간인 신분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대법관이자 3부요인 대우를 받는 중진 법조인을 심문하겠다는 발상은 괴이하고 터무니없다. 더구나 그가 마음먹은 심문 도구가 야구방망이이라니, 그저 섬뜩하다(실제로 검찰이 공개한 참고자료엔 야구방방이 3개, 쇠망치 3개, 포승줄 사진이 보인다).
12.3 내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노상원에겐 안타깝게도 야구 방망이를 휘두를 기회는 사라졌다. 많은 시민들은 "하마터면, 나치 히틀러 시대의 게슈타포 고문 망령,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고문 망령이 21세기에 되살아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친위대 의사들의 생체 실험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주요 전범들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이은 12개 후속재판 가운데 가장 먼저 열린 것이 '의사 재판'(후속재판 1)이다. 피고인 23명 가운데 20명이 의사였기에 이른바 '의사 재판'이라 일컬어졌다(나머지 3명은 의료행정관). 12개 후속재판에서 교수형 판결이 내려진 24명의 사형수(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된 11명을 빼면 13명) 가운데 7명이 '의사 재판'에서 나왔다.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전쟁터에서 많은 독일 군인들이 지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망한다는 보고를 받고 충복인 의사 라셔에게 혈액응고 촉진제를 개발하라고 명령했다. 라셔는 출혈이 심한 상처를 처리하기 위해 직접 개발한 혈액응고 촉진제인 폴리갈의 효능을 알아보려고 몇 가지 실험을 했다. 다하우 수용소의 화장터에서 실험 대상들에게 폴리갈 약물을 주입한 다음, 여전히 의식이 있는 수감자들의 사지를 절단하여 상처에서 혈액이 떨어지는 비율을 측정함으로써 약물의 효과를 수량화했다] (조슈아 퍼퍼·스티븐 시나, <닥터 프랑켄슈타인>, 텍스트, 2013, 139쪽).
위에 옮긴 글은 2명의 미 법의학자가 밝힌 나치 친위대(SS) 소속 의사들의 전쟁범죄 실상이다. 친위대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에 따라 '의학 실험'이란 명분 아래 그런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다. 가학적인 혈액응고 실험이 이뤄졌던 곳은 악명 높은 다하우 강제수용소였다. 독일 뮌헨 북쪽 교외에 있는 다하우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바로 뒤 독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수용소였다.
나치 히틀러 정권은 처음엔 정치범들을 잡아넣는 곳으로 다하우 수용소를 활용했다. 전쟁이 터지면서 그곳엔 유대인들과 더불어 소련군 포로들이 갇혔다. 수감자들은 노예노동으로 혹사당했고 형편없는 식사량과 학대, 그리고 발진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은 그들의 죽음을 앞당겼다. 다른 여러 수용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독일 패전 뒤 다하우를 비롯한 수용소에서의 잔혹행위에 관련된 나치 의사들은 전쟁범죄자로 법정에 섰다. 이른바 '의사 재판'에서였다.
가학적 실험으로 7000명 희생시켜
2명의 미 법의학자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은 냉동시험, 독극물 실험, 항생물질 실험, 혈액응고 실험 등 70종이 넘는 위험한 생체실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치 의사들은 7,000명 넘는 유대인, 동성애자, 집시, 정치범, 소련 전쟁포로를 실험용으로 쓰다가 끝내 숨지도록 만들었다(조슈아 퍼퍼·스티븐 시나, 131쪽).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쳤던 수용소 가운데 하나가 독일 뮌헨 북서쪽 교외에 있는 다하우 강제수용소다. 그곳 의사들은 수감자들을 상대로 여러 종류의 생체실험을 했다. 의사 한스 에핑거가 가학적 실험 재료로 쓴 것은 바닷물이었다. 2명의 미 법의학자가 쓴 글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에핑거를 비롯한) 의사들은 약 90명의 집시에게 음식물도 주지 않고 해수만 마시도록 강요했다. 집시들은 탈수 증세에 시달린 끝에, 염분이 없는 물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려고 심지어 대걸레질을 하고 나서 바닥을 핥아댔다. 이 잔혹한 실험으로 피해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조슈아 퍼퍼·스티븐 시나, 138쪽).
짠 바닷물만 마시도록 강요된 가련한 집시들의 목은 갈증으로 타들어갔다. 오죽하면 대걸레질을 하고 난 바닥의 물기를 핥았을까 싶다. 같은 상황을 놓고 위에 옮긴 글과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할아버지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던 프랑스 의사 미셸 시메스가 나치 의사들의 잔혹행위를 고발한 책(Hippocrate aux enfers, 2015)에서다.
시메스에 따르면, 강제수용소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바닥을 청소한 뒤 걸레를 깜박 잊고 두고 가자, 집시들이 '걸레의 썩은 물'이라도 입에 대려고 서로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 상황을 전해들은 나치 의사는 크게 화를 내면서 걸레에 입을 댄 수감자 2명을 침대에 묶어 고통을 더 안겼다. 그가 화를 낸 이유는 '실험결과를 왜곡시키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을 살리려는 실험이 아니었다"
나치 의사 의사 한스 에핑거와 해수 실험을 함께 헸던 빌헬름 바이글뵉(독일 공군 소속 군의관)은 패전 뒤 붙잡혀 뉘른베르크 '의사재판' 법정에 섰다. 바이글뵉은 법정 증인으로 불려온 사람에게 하마터면 크게 얻어맞을 뻔했다. 증인은 바이글뵉의 가학적 실험으로 고통을 받다가 그야말로 운 좋게 살아남은 이였다. 법정에서 나치 의사의 얼굴을 보자말자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분노가 치솟았기에, 피고석으로 달려가 그를 때리려했다. 증인은 분을 삭이면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나는 가장 형편없는 노란 바닷물을 마셨다. 우리는 갈증과 배고픔에 미쳐 갔지만, 저 의사는 우리를 동정하지 않았고 얼음처럼 냉정하게 대했다. 한 집시가 바닷물을 마시길 거부하자, 길이가 50cm가 되는 음식물 주입관을 그의 입에 집어넣고 바닷물을 쏟아부었다](미셸 시메스, <나쁜 의사들>, 책담, 2015, 63쪽).
바이글뵉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나치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형기의 절반도 채우지 않고 1952년 풀려났다. 그리고는 1963년 죽을 때까지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 악마의 의사에게 의료 면허증이 취소되지 않은 것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이 전후 일본에서 의과대학 교수나 병원장을 하며 지냈던 상황과 닮았다. 731부대의 '악마의 의사들'은 나치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수감자들에게 소금 성분이 없는 증류수만을 마시도록 강요했다. 그들이 며칠 동안 살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실험이었다.
[731부대의 '의학적 실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실험이 아니었다. 죽음을 전제로 한 실험이었다. 생체실험을 겪는 피실험자의 고통을 바탕으로, 세균폭탄으로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내려 했던 '학살 실험'이었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279쪽).
731부대 의사들은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온갖 종류의 가학적 생체실험으로 조선인 독립투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죽였다(희생자 규모는 최소 3,000명에서 1만 명으로 추정). 잘 알려졌듯이, 이들 악마의 의사들은 미국 세균부대에 그동안의 축적된 실험 자료를 넘겨주는 '더러운 거래'로 면죄부를 받았다. 눈앞의 실리에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는 늘 밀리는 것일까.
친위대 의사들, 형장 끌려가며 두들겨 맞아
나치 의사들을 피고석에 세우고 1946년 12월9일부터 1947년 8월20일까지 벌어졌던 '의사 재판'(후속재판1)에서 7명은 교수형, 5명은 무기형, 4명은 10년에서 20년형에 이르는 징역형이 내려졌다(7명에겐 무죄). 의사재판 피고석에 선 이들은 히틀러 총통의 개인주치의,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주치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수석의사, 독일유산학술협회 국가관리관, 친위대 고위간부 등이었다.
교수형을 받은 '히틀러의 의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카를 브란트(히틀러 개인주치의, 친위대 집단지도자 겸 무장친위대 중장, 공중보건위생 국가판무관), △카를 게프하라트(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주치의, 친위대 중장, 친위대 및 경찰 상급임상의 국가의사, 독일적십자사 총재), △루돌프 브란트(하인리히 힘러의 측근, 친위대 국가지도자 겸 내무부 각료청장), △빅토어 브라크(친위대 상급지도자 겸 무장친위대 지도자, 총통수상부 상급직무지휘자), △발데마르 호펜(무장친위대 최고돌격지도자,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수석의사) △요아힘 무르고프스키(무장친위대 집단지도자, 친위대 및 경찰 최상급 위생학자 국가의사, 무장친위대 위생연구소장) △볼프람 지페르스(친위대 고위간부, 독일유산학술협회 국가관리관).
이들 7명은 1948년 6월2일 바이에른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처형됐다. 죽음에 앞서 이들은 감옥 안에서, 또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미군 병사들로부터 두들겨 맞는 수모를 겪었다. 특히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였던 카를 브란트, 하인리히 히믈러의 개인 주치의였던 카를 게프하르트는 다른 사형수들보다 더 심하게 맞았다.
죽을죄를 지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도망쳐 법정에 서지 않은 히틀러의 의사들도 적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의무관으로 있던 요제프 멩겔레(1911-1979)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이비 우생학에 미친 멩겔레는 '의학 연구'라는 명분 아래 적어도 250명의 쌍둥이를 온갖 가학적인 방법으로 실험을 했던 '악마의 의사'였다. 패전 뒤 멩겔레는 남미 아르헨티나로 도망쳤고, 1979년 브라질 해변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죽었다.
도망치기보다는 자살로 죄 많은 삶을 스스로 끝낸 나치 의사들도 있다. 독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악명을 떨쳤던 한스 에핑거가 그러했다. 그는 위에서 살폈듯이, 수감자들에게 바닷물을 먹이는 '해수 실험'을 이끌었던 '악마의 의사'다. 뉘른베르크 '의사재판' 소환을 앞둔 1946년 9월 독극물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판결문 쓰자말자 감형하는가"
미국은 12개 후속재판이 끝나자 곧 감형 작업에 들어갔고, 죄수들은 하나둘씩 풀려났다. 1950년 4월 미국에서 특별사면위원회 위원 3인이 독일로 파견돼 모든 판결문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 3인은 뉴욕최고법원 제1부 상고재판장, 뉴욕 사면위원장, 국무부 법률자문위원(현역 준장)을 맡은 법조인들이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념비적인 대작(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s, 1966)을 쓴 라울 힐베르크는 이런 미국의 태도를 가리켜 "판결문을 쓰자말자 감형이 시작됐다"고 비판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2008, 1512쪽).
미국이 나치 전범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을 것은 (지난주 글에서도 살펴봤듯이, 일본 전범자들을 풀어준 것과 마찬가지로) 동서냉전 구도에서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서독을 붙잡아두려는 정책에서 비롯됐다. 서독의 재무장도 미국이 바라는 바였다. '히틀러의 장군들'이 흐지부지 풀려났듯이, '히틀러의 의사들'도 잇단 감형과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이렇듯 나치 전쟁범죄자에 대한 정의로운 징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단 하나 소득이 있다면, 의사 재판 뒤 의사들이 어떤 의료윤리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402-404쪽 참조 바람).
다음 주 글에선 나치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노예노동으로 부려먹으면서 배를 불린 '히틀러의 기업인들'과 나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렸던 '히틀러의 법률가들'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후속재판과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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