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수안 몇 해 전 토종씨앗에 관한 전시에서 한 이미지를 접하게 됐다. 씨앗과 할머니 농부들이 담긴 이미지였는데, 과거와 미래가 한 장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때마침 작은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시기라 나 역시 토종씨앗을 알아가고 싶은 마음에 관련 단체를 찾았다. 리서치 겸 활동가분들과 함께 여러 마을을 다녔는데, 토종씨앗을 심어온 농부분들이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어서 계절이 지나 찾아뵐수록 안 그래도 적은 씨앗의 개체 수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체감했다. 급박한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모종의 사명감도 느꼈다.
하퍼스 바자 평택에 사는 윤규상 농부, 화순에 사는 장귀덕 농부가 일평생 모은 씨앗을 한 알 한 알 애지중지 여기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종자회사가 판매하는 상품화된 씨앗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토종씨앗을 심어온 농부들이다.
설수안 두 분은 특히 본인들이 고집스럽게 지켜온 씨앗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내가 잘 알지, 내가 하는 일을 보여주겠다는 자부심. ‘씨갑시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예부터 토종씨앗을 잘 돌봐온 분들이 마을에 꼭 한두 분씩 계셨다고 한다. 활동가들은 이런 분들을 찾기 위해 시골의 위성 사진을 보며 무작정 만나러 간다. 농지가 바둑판처럼 반듯한 곳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밭이 듬성듬성 나 있는 곳일수록 토종씨앗이 있을 확률이 높다. 도시인들은 반듯이 줄지어진 논밭을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으로 떠올리지만, 토종 작물은 다양한 종류가 같이 섞여 있어야 잘 자란다. 그 안에서 작물들이 더욱 강인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하퍼스 바자 여러 종류가 모인 텃밭을 상상해보니 피트 아우돌프의 정원이 떠오르기도 한다.(웃음)
설수안 맞다. 카오스적이랄까. 할머니들이 많은 마을일수록 씨앗이 존재할 확률이 높기도 한데, 공통적으로 꽃을 좋아하셔서 꽃이나 나무가 밭에 섞여 있다. 춘천에 사는 이경희 선생님의 밭에 갔을 땐, 일부러 풀을 안 뽑으셔서 가자마자 촬영감독이 “어디가 밭이에요?” 묻기도 했다.(웃음) 원래 자연은 이렇게 다종다양하게 생겼는데, 한 가지 작물만 줄지어 있는 논밭이 어쩌면 폭력적인 모습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하퍼스 바자 개골팥, 조선대파, 제비눈콩.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작물들은 시장이나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간혹 마르쉐 같은 로컬 플리마켓이나 파인다이닝 셰프들의 실험적인 한식 메뉴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설수안 우리는 감자를 떠올리면 ‘수미감자’ 정도만 알지만, 예전에는 ‘눈뻘개감자’ ‘자주감자’ 등 수많은 감자 종류가 존재했다고 한다. 볶음용, 구이용 각각의 질감과 맛이 다르고. 씨앗을 조금씩 얻어 수확한 다음, 맛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맛과 향이 너무 진하게 퍼진다. 식물이 자신의 방어력을 키우기 위해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며 자랐을 때, 그게 결과로 나타나는 거다. 주식으로 먹는 주요 작물일수록 빠르게 사라진다. 벼는 한때 우리나라에 1천5백여 종의 토종벼가 있었지만 이젠 거의 정리한 개량된 종뿐이다.
하퍼스 바자 현재 토종씨앗은 얼마나 남아 있는 상황인가?
설수안 ‘토종씨드림’이 해당 지역을 방문해 정리한 자료를 보면, 대략 1만여 종이 못 되게 씨앗이 발견되었는데 작물의 종류가 겹치는 것이 많다. 들깨나 녹두같이 그 자체로 씨앗을 먹을 수 있는 작물들이 천 단위로 존재하고. 배추나 상추 씨를 받는 분들은 하드코어의 작업을 하는 농부들이다. 영화에서 윤규상 농부 님이 배추 씨 받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7월에 씨앗을 털 때까지 그 땅에 아무것도 심지 않고 씨를 받기 위해 기다린다. 반 년 동안 땅의 생산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설수안 장기적으로 보면 개량종을 계속 심을수록 발아율은 낮아진다는 결과도 있다. 한 해 수확하고 나면 씨앗의 생명력이 줄어드는 거다. 사람에 빗대면 합스부르크 왕가 같달까. 익히 알려져 있듯 다국적 기업에서 씨앗의 값을 올리면, 농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개량종을 사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모든 농부들이 토종씨앗을 심을 수는 없는 현실이라도, 더 많은 소비자와 생산자가 이런 현실을 인지해야 멸종의 상황이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퍼스 바자 영화는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할 때까지, 24절기의 시간이 흘러가듯 이어진다. 인서트로 ‘투 두 리스트’가 담긴 캘린더가 등장하는데 스케줄이 무척 빼곡하더라.
설수안 농사는 진짜 분주하고 다이내믹한 일이다. 농부들에게 2주라는 텀을 지닌 절기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다. 1~2주 주기마다 찾아가면 작물들이 완전히 달라진다. 한번은 올해 온난화로 더워서 왜 이렇게 배추의 싹이 안 트지 걱정하는데, 처서가 지나자 땅의 열기가 식고 싹이 트더라.
하퍼스 바자 “유월은 게으른 놈 잠자기 좋고 부지런한 놈 풀 메기 좋은 때” 같은 농부들의 말도 인상적이다.
설수안 토종씨앗이 사라지듯 농부들만의 말 역시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듣다 보면,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들이 막 나온다. 같은 작물도 지역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고. 예를 들어 경기 북부 연천에서는 빨간색이 아닌 색을 ‘희다’라고 표현하는데, 청상추를 ‘흰 상추’라고 말하기도 한다. 옛부터 정치적 긴장감이 높은 지역이었던 게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하퍼스 바자 구술로 농사와 식문화를 접하며 무엇을 깨달았나?
설수안 우리가 삶에서 다양한 감각을 놓치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예를 들어 충청도에는 ‘베틀콩’이라는 토종작물이 있는데 ‘고소하다’와 비슷하게 ‘베틀하다’라는 맛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반영된 거다. 토종씨앗이 사라지면서 맛은 물론, 그 단어와 표현 역시 인지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하퍼스 바자 영화를 통해 토종씨앗이 낯선 이들이 농부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가장 바라는 지점은 무엇인가?
설수안 다른 삶의 리듬이 있다는 것. 생산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리듬에 동화되길 바란다. 영화를 찍으며 씨앗을 지키는 농부들이 이 시대의 장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얼마를 받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내 손에 닿은 걸 최고로 만들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흔히 우리는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1시간에 이만큼 일을 하면 잘하는 거고, 못 하면 느린 거고. 그런 기준에 맞추려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분들은 자연이 알려주는 리듬에 따라 자신의 리듬대로 살아간다. 잠시나마 관객들이 두 농부의 시간에 동화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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