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연합뉴스) 김동현 특파원 = 미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부의 대변인 브리핑은 2시간을 넘기 일쑤다.
세계 각국의 언론이 글로벌 이슈뿐만 아니라 자국 현안에 대해 미국 정부의 입장을 묻기 때문인데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의 기자들이 미국의 입을 빌어 자국 정치 상황을 비판하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는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이 마치 세계의 재판관이나 현자인 것처럼 질문하는 그런 타국 기자들을 보면서 후진국에서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이후 한국 언론이 그런 처지가 됐다.
한국 특파원들은 연일 브리핑에서 계엄과 탄핵 사태, 불안정한 한국 정세, 심지어 김어준 씨의 '암살조' 제보 주장에 대해 질문했다.
한국의 핵심 우방인 미국의 입장이 관심사이고 중요하기에 질문은 당연히 나올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고개를 들 수 있는 날도 있었다.
미국 정부는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의 회복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사석에서 만난 미국 전·현직 관료들은 민주주의 선진국인 한국에서 명분 없는 계엄령이 선포된 데 대해 충격을 금치 못하면서도 국회의원들과 시민이 나서서 계엄령을 해제시키고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과정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에 국제사회에서 실추된 국가 이미지가 국민 덕분에 되살아난 것이다.
필자는 미국인들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위기감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에 더 강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한다.
한 파티에서 인연을 맺은 미국인 부부는 최근 필자에게 '한국은 어떻게 대통령을 탄핵했냐, 우리도 트럼프를 탄핵하고 싶다'며 부러운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첫 임기 때 두 번이나 연방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는 불명예를 겪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미국의 군사 지원을 조건으로 정적인 조 바이든 대통령의 차남을 수사하라고 압박한 혐의 등으로 2019년 12월 18일 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또 하원은 트럼프 당선인 퇴임을 일주일 남긴 2021년 1월 13일 대선 패배 후 지지자들의 의회 폭동을 부추겨 내란을 선동한 혐의로 두 번째로 탄핵소추했다.
미국 진보 언론 다수가 한국의 계엄·탄핵 사태를 보도하면서 트럼프 당선인과 자주 비유하는 이유가 바로 두번째 탄핵소추 사유였던 내란 혐의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하원의 탄핵소추안 처리 이후 상원의 탄핵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돼야 대통령직을 상실하게 되는데 상원의원 3분의 2의 찬성표가 필요하다.
당시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상원을 사실상 양분한 상태에서 공화당 상원의원 대부분이 트럼프를 지키기로 선택해 그는 두 번 다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미국 의회 못지않게 정치 양극화가 심한 한국 국회도 국민의힘 의원 대부분이 윤 대통령 감싸기에 나섰지만, 탄핵소추안 가결에 필요한 숫자는 확보했으니 트럼프 당선인에 비판적인 미국인이 보기에는 부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 탄핵소추 뒤에도 한국 상황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앞으로 부끄러운 날보다 자부심을 느끼는 날이 많기를 간절히 바란다.
blue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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