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기, 가장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습니다. 그때 2년 반 동안 배달 노동자로 일했던 경험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됐어요.”
오는 1월 4일과 5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선보이는 무용 작품 ‘당신을 배송합니다’의 백주희 안무가의 말이다. 지난 26일 서울시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열린 ‘제17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을 소개하는 1차 기자간담회에서였다.
2008년 시작된 ‘공연예술창작산실’(이하 ‘창작산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대표 지원사업으로, 연극, 무용, 전통극 등 다양한 공연예술을 발굴부터 제작까지 지원한다. 특히 동시대 문제의식을 담은 우수작을 발견시키며 공연 비수기인 1~3월의 무대를 풍성하게 채워왔다.
내년 3월까지 이어지는 ‘창작산실’의 포문을 여는 1월의 개막작들은 유독 더 뜨겁다. 노동, 젠더, 여성 살해, 사회적 폭력…. 동시대의 사회를 성찰하게 하는 주체와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무대에 소환한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에 의해 해석돼 왔는데, ‘무고한 희생자’ 역에 그쳤던 (오셀로에게 죽임 당한) 데스데모나에게 스피커를 주고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습니다.” (박새봄 작가)
뮤지컬 ‘오셀로의 재심’은 고전 ‘오셀로’를 여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고 다시 쓴다. 남편 오셀로에게 살해 당한 데스데모나에게 마이크를 주고, 가해자 오셀로를 법정에 세우면서다.
박새봄 작가는 학생들에게 고전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읽는 법을 알려주려고 극을 쓴 게 시작이 됐다고 했다. ‘오셀로’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 있었다. “20대 학생들은 연애와 결혼에 대해 고민할 때인데 (오셀로에 나타난 지점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했다”면서 “남녀 간의 사랑을 매개로 실제 현실에 어떤 폭력들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되살린 건 ‘피해자’인 데스데모나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복수의 여신’이지만 사회가 문명화되며 누락한 신인 ‘에리니에스’를 데려온다. “친족살해 등 미친 듯이 복수를 하러 쫓아와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이들”이라면서 “이들이 여는 특별법정이라는 신화적인 공간에 오셀로를 세우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 작가는 “법정 드라마처럼 진행되기도 한다. 원작을 몰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는 단연 주목되는 작품이다. 남역 배우를 꿈꾸며 여성국극단에 입단한 ‘소년’의 여정을 통해 전통적인 젠더 수행을 교란한다. 주목할 점은 기존 연구자들에게 ‘퀴어적’으로 ‘해석’되는 여성국극이 아닌, 작품 자체가 연극적 요소를 강화해 ‘퀴어극’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소년’을 연기하는 3세대 여성국극 배우이자, 여성국극제작소의 박수빈 대표는 "여성국극에 퀴어적 서사를 담는다는 게 계승자로서 부담이 됐다“고도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장르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여성국극을 그대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꿈꾼다면) 지금 해야 하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라고 했다.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품입니다. 편견을 무너뜨리고 관객과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박수빈 대표)
배우와 연출진은 가히 ‘드림팀’이다. 고연옥 작가의 대본을 구현하는 구자혜 연출은, 동물권과 퀴어정치학 등 소수자적 감각을 첨예하게 동시대 무대에 올려온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이 여성국극 1세대 배우인 94세 이소자 배우부터, 박수빈 대표를 비롯한 3세대 배우들과 손을 잡은 것. 음악도 새롭다. 박 대표는 “여성국극은 보통 전통악기를 8개 이상 사용해 라이브 음악으로 들려준다. 이번에는 신디사이저를 비롯해 다양한 악기가 사용된다”고 귀띔했다.
다른 목소리는 더 있다. 2018년부터 '기존의 인형들'이라는 이름으로 인현극을 선보인 이지형 연출은 세 편의 작품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작품을 새롭게 내놓는다. 비인간인 ‘인형’을 ‘조종’이라는 인간중심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기 해 상상력을 넓힌다. 일상의 사회적인 문제를 시적으로 풀어내던 배혜률 작가는 연극 ‘목련풍선’을 통해 노년의 삶과 사회적인 죽음, 애도를 겹쳐 담는다.
혼란스러운 정국 상황에서 몰입할 만한 작품도 있다. 오는 1월 3일 ‘창작산실’ 작품의 첫 스타트를 끊는 뮤지컬 ‘무명호걸’이 주인공이다. 평범한 동시대의 인간들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을 구하기 위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역사 판타지극.
총괄프로듀서인 이다린 주다컬쳐 대표는 "무명의 영웅, 시민, 서민들이 난세에 뭔가를 지켜낸 것처럼 모두가 힘을 합쳐 나라를 지키는 데 일조한 이야기"라며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도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어수선한 시국, 극장이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창작산실’의 작품은 예술에 몰입하는 순간이 사회의 현실과 유리되는 것이 아닌, 더 첨예하게 세상을 읽고 상상하게 하는 것임을 알려주지 않을까.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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