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 볼 수 있는 사파의 계단식 논 전경.
환대와 친절을 양껏 받은 비행 끝에 도착한 하노이에선 본격 사파 여정이 시작됐다. 무심코 바라본 차창 밖 풍경이 차츰 변할 때마다 꼬박 6시간을 달려온 피로가 잊혔다. 노란 벽에 나무 문을 단 프랑스풍 집들은 베트남 전통 모자 ‘논라’를 쓴 사람들과 어우러졌고, 도로에 줄지은 집들은 더위를 식힐 겸 대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이틀 내내 열리는 결혼식장은 한밤중에도 떠들썩했다. 한참을 달리니 고도가 높아졌다. 간간이 들른 휴게소 직원들의 생김새와 언어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느새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졌고, 옷가지를 한 겹씩 덧입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 귀가 먹먹해질 쯤 눈앞에 사파가 나타났다. 사파는 베트남에서 거의 유일하게 눈이 내리는 중국 국경 고산지대 마을이다. 해발 1650m의 마을엔 계단식 논농사를 짓는 여러 소수민족이 생활하고 있다. 사파의 하이라이트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판시판이다. 비행기와 버스를 갈아타고, 케이블카의 도움을 받은 뒤 600여 개의 계단을 올라 드디어 해발 3143m 판시판 정상에 도착했다. 잠시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순간만이 이곳이 고산임을 느끼게 해줄 정도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의 연속이었다. 그간의 이동 과정이 아쉬워질 찰나, 구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얼음 알갱이들이 손끝에 잡혔고, 그 너머로 거대한 청동 불상이 등장했다. 시야가 조금씩 트이자 쩐 왕조 건축양식에서 영감을 얻은 빅반젠 사원과 석탑을 마주할 수 있었다. 구름 속에 몸을 숨긴 불상의 장엄함, 부러 고행의 길을 택하며 이 높은 곳에 사원을 지은 이들의 숭고함이 전해져 소박한 새해 기도를 올렸다. 내내 머문 ‘호텔 드 라 쿠폴-엠 갤러리 사파’에선 여독을 씼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빌 벤슬리가 설계한 호텔은 다양한 색채를 반영한 중정형 구조로 이뤄졌다. 사파의 랜드마크이자 판시판으로 연결되는 사파역과 이어져 어디로든 이동이 쉽다. 온수 풀과 객실 욕조에선 노곤한 몸을 녹일 수 있고, 맛있는 쌀국수를 포함해 아침부터 밤까지 배를 불리는 레스토랑도 잊을 수 없다. 사파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같은 풍경으로 나를 위로했다. 롱 패딩에 우비를 걸치고 산을 오를 때도, 구름 위에 앉은 듯 식사를 할 때도, 호텔 발코니에서 안개를 바라볼 때도 으레 떠올리던 동남아나 베트남과는 전혀 다른 낯설음이 색다른 자극을 줬다. 판시판 아래로 펼쳐진 논을 볼 수 있는 맑은 날을 만날 때까지, 사파에 다시 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신선놀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호텔 드 라 쿠폴-엠 갤러리 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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