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전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이 선거를 치른 해였지만 여성 대표성 증진을 향한 발걸음은 다소 더뎌졌다. 실제 선거 결과가 발표된 국가의 60%에서 의회 내 여성 의원 수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와 미국, 프랑스, 포르투갈,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한 기타 21개국에서는 이번에 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여성 의원 수가 감소했다. 특히 유럽의회의 경우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의원 수가 줄었다.
아예 여성 의원이 0명이 된 국가도 있었다.
푸아케나 보레함 박사는 투발루 역사상 3번째로 의원이 된 여성으로, 총 16명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8년간 유일한 여성 의원이었다. 그러나 올해 그는 의원직에서 밀려났다.
임기 말, 보레함 박사는 성차별을 범죄로 규정하자는 헌법 개정 캠페인에 참여했고 개정을 끌어냈다.
해당 캠페인의 일환으로 보레함 박사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연설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 회관에서 연설했는데 이때 일부 남성들이 자리에서 이탈해 퇴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보레함 박사는 "(이번에 의회에 입성하지 못한 것은) 여성으로서 내가 발언한 대가인 것 같다"면서 "앞으로 4년 동안 우리 의회에 여성 대표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고통스러웠다"고 토로했다.
투발루는 여성 의원이 비율이 불과 8%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다.
여성은 전 세계 의회 의석수의 27%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성 의원 수가 남성 의원 수와 유사한 곳은 13개국에 불과하다.
올해 영국과 몽골, 요르단,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여성 의원 수가 증가했고 멕시코와 나미비아에서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현재 라틴 아메리카와 일부 아프리카 지역은 여성 정치인 배출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지난 1907년 핀란드에서 세계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선출된 이후 동등한 대표성을 향한 발걸음은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1995~2020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여성 대표성은 2배 늘어났지만 지난 3년간 그 진전 속도는 둔화한 것이 사실이다.
워낙 국가별로 상황도 다르고 정치적 요인도 복잡해 올해 여성 대표성 진전 속도가 더뎠던 이유를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포르투갈, 파키스탄, 미국 등 일부 국가의 경우 의회가 우파 성향으로 기울면서 여성 의원 수가 감소했다. 이들 국가의 우파 정당에는 비교적 여성 수가 적다.
영국 등 이번에 여성 의원 수가 늘어난 곳에서도 동일한 역학 관계가 작용한다. 방향이 반대일 뿐이다.
프랑스에서는 조기 선거가 여성 후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프랑스 정치대학에서 젠더 및 정치를 연구하는 레잔 세냑은 "많은 것이 걸린 매우 중요한 선거라고 인식될수록 정당에서는 여성 후보 수를 줄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모든 선거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회의 성별 구성을 50대 50으로 달성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진 몇 가지 요소가 존재한다.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한 로지 캠벨 정치학 교수는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이 높은 직위의 리더 역할에 적합하리라 잘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여성들은 '의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같은 질문 등 옆에서 자극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보레함 박사도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계에 뛰어들게 됐다.
마취과 전문의였던 보레함 박사는 병원 현장에서 수많은 투발루인들이 당뇨병으로 인해 사지를 절단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 그러다 한 멘토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정부에 진출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됐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른들, 특히 집안의 남성 어른들로부터 정치는 여성이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반대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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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젠더와 정치학을 연구하는 레이첼 조지 박사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보다 누군가를 돌볼 책임을 더 많이 지고 있으며 이는 여성의 정계 진출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출산 휴가를 제공하는 의회가 없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여성들은 선거 운동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출마를 위해 일을 그만들 수 있는 재정적 자유를 갖추기도 더 어렵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됐다. 여러 국가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현재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여성 공직자에 대한 공격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에만 몇몇 유명 여성 지도자들이 더 이상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정계를 떠났다.
멕시코 상원의원이던 인디라 켐피스는 남성 의원들과 달리 각종 심각한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저는 협박도 당했고 정치적으로 박해 대상이었으며 제 가족과 직원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매우 폭력적이었습니다."
한 번은 차를 타고 가던 중 무장한 남성들이 따라오며 협박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다고 한다.
또 그의 남편은 이들의 결혼 생활을 흔들려는 누군가로부터 악성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가족들도 협박 전화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여성으로서 타인의 안전에 무책임하게 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가족들도 끌어들입니다."
아울러 여성들이 이러한 공격에 참여하는 모습에 마음이 더욱 아팠다고 한다.
사람들로부터 여성으로서 정치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냐는 질문을 들으면 더 이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설명이다.
"(정치 입문을 생각하는) 젊은 여성에게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까요? 살아 돌아올지 알 수도 없는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한편 올해 선거에서 낙선하기 전까지 한국의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던 장혜원 씨는 "욕설과 모욕, 조롱 등은 이미 온라인에서 일상화된 부분이었다"며 말을 꺼냈다.
"내가 TV에 출연할 때마다 '왜 페미니스트를 출연시키느냐'는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장 전 의원은 선거 유세 중 자신이 평등 임금이나 성희롱 등 여성 관련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 연인들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듣고 있다가 남성이 여성을 이내 끌고 가버리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때로는 거칠게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저는 반발이 엄청나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는 '미투' 운동이 일며 몇몇 남성 유명인들이 성희롱 의혹에 휩싸였다. 그 이후로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이 역차별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느낀다.
국제의회연맹(IPU)에서 젠더 부문을 이끄는 마리아나 두아르트 무첸버그 책임자는 올해 선거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다시 한번 두드러졌으며 한국의 일부 정당들은 젊은 남성들 사이의 반페미니즘 정서를 계속 부추기거나, 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 전 의원이 속한 정당이 올해 총선에서 크게 패했고 이는 분명 낙선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을 테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 결정적이었다는 게 장 전 의원의 생각이다.
물론 이번 총선이 한국의 모든 여성 후보들에게 재앙과도 같았던 것은 아니다. 여성 국회의원 수는 19%에서 20%로 약간 높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 평균인 27%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럽 젠더평등연구소'의 칼리엔 쉴레는 여성의 대표성이 높아지면 기본적인 공정성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평등한 의회는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성별이 평등하게 섞인 집단일수록 더 나은 의사 결정을 내리고 한쪽 성별로 치우치지 않은 기업 이사회는 더 높은 수익을 내며 심지어 국가의 GDP도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젠더 평등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성별 할당제이다. 평균적으로 할당제가 없는 국가에서는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21%였으나, 할당제가 있는 국가의 경우는 29%였다.
정치적 의지와 할당제 덕에 멕시코에서는 지난 2018년 의회 내 젠더 평등을 이루어 냈으며 높은 지지율을 자랑했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은 여성 의원 50% 쿼터제를 실시했다.
그리고 올해 멕시코에서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후보가 당선되며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하지만 2018년 멕시코 상원의원직에 당선됐던 켐피스 전 의원은 당선은 싸움의 절반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나는 권력을 쥐고자 정치계에 있고 싶은 여성"이라는 그는 "수많은 여성들이 이에 대해 말하기 부끄러워하기에 나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 중요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회의에서는 자신이 배제된다고 느꼈다.
"저는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마치 남성들만의 리그 같았죠."
그리고 매일 남성 동료 의원들로부터 차별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켐피스 전 의원은 "그들은 내게 재능이 없고 난 해낼 수 없다고 끊임없이 말했다"면서 "한 남성은 나보고 자기 덕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유엔 여성기구의 줄리 발링턴은 정부 직책은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자리이나, 이 분야에서 여성 대표성은 전반적으로 낮다고 지적했다. "(정부 직책은) 임명직이기에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쉽게 젠더 평등을 이룰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게 처참하다"는 것이다.
또한 유엔 여성기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부 직책 중에서도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주로 주어지는 금융, 국방 분야보다는 인권, 평등, 사회 문제와 같은 특정 분야의 역할이 더 많이 주어진다.
조지 박사는 "여성이 참여하면 평화 협상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고 지속될 가능성도 높아진다"면서 "이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켐피스 전 의원은 언젠가 대선에 출마하기를 꿈꾼다. 그는 자신이 속한 정당이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밀어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당 측은 이를 부인한다. 켐피스 전 의원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상원의원직을 내려놨다.
하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제가 입당했을 때만 해도 '상원의원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젊은 여성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떠날 때쯤에는 많아졌죠."
한국의 장 전 의원은 다음 선거에서 또 한 번 출마할 계획이다. 투발루의 보레함 박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추가 데이터 분석: 레베카 웨지-로버츠(BBC Verify 팀)
디자인: 래이스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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