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한점 안 드는 돈의동 쪽방촌…"엊그제도 한 명 죽어있더라"
난방되지만 '온정' 대체 못 해…명함 받자 "전화해도 되죠?"
(서울=연합뉴스) 이영섭 기자 = "내일이 크리스마스라지만 별 의미는 없어요. 어제, 오늘처럼 방에 있다 보면 다 지나갈 거예요."
24일 오후 1시께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서 만난 주민 황모(64)씨는 성탄절 계획을 묻자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 480명이 사는 돈의동 골목 곳곳은 점심 무렵인데도 해가 한 점도 들지 않았다. 한 벽돌 건물 외벽의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는 그대로 얼어 있었다.
사진을 찍다가 마주친 황씨에게 기자라고 소개하자 동네를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한 3층 건물을 가리키며 "엊그제 저기 2층에 살던 남자 한 명이 죽었다. 방이 하도 조용해 옆집에서 신고했더니 죽어 있었다더라"고 설명했다.
숨진 80대 남성은 기초생활 수급자였으며 사인은 병사였다고 경찰과 주민센터는 전했다.
황씨는 기자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성인 남성 2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방에는 담요와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아버님, 어머님, 누이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만 남았다. 사는 게 의미가 없다"라고 털어놓으면서도 목소리는 밝았다.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자기 얘길 듣는 건 처음이라 했다.
돈의동 주민 대다수는 황씨와 같은 60대 이상 기초생활 수급자로, 일정한 직업 없이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 대부분이다.
다행히 2000년부터 도시가스 설비가 갖춰져 겨울에도 방은 따뜻하다.
하지만 난방이 사람 사이 교류를 통해서만 채워지는 '온기'를 대체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현관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박모(68)씨는 대뜸 기자에게 "발가락이 없어요"라며 신발을 벗었다.
지체 장애인인 박씨는 노숙 생활을 이어오다 10년 전부터 돈의동에 자리 잡았다 했다. 그는 어눌한 말투로 "길에서 자다가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모두 절단했다"고 설명했다.
박씨의 방에선 지린내가 진동했다. 담요 옆 쓰레기 사이에 방금 산 듯한 술병이 보였다. 그에게 크리스마스 계획을 묻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황씨와 함께 걷다 만난 김모(81) 할머니도 처음 만난 기자에게 한참 동안 자신의 삶을 얘기해줬다.
김 할머니는 30대 때 마산에서 상경해 돈의동에 자리 잡아 45년째 이곳에서 산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 악착같이 돈을 모아 쪽방 1채의 주인이 됐지만, 재작년 말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마실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답답해"라면서 볕이 드는 대로변으로 걸어갔다.
돈의동을 돌아다닌 1시간 동안 마주친 주민들은 서로 잘 대화하지 않았다. 기자와 눈도 잘 안 마주쳤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걸면 대부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들려줬다.
헤어질 무렵 황씨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자 그는 "답답할 때 전화해도 되죠?"라고 웃으며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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