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반성문이다. 에밀 졸라의 유명한 논설 "나는 고발하다"처럼 민주공화국의 적들을 준열히 고발하는 글을 쓰면 좋았겠지만, 그 전에 내가 써야 할 것은 "나는 반성한다"는 고백이다. 12월 3일 밤, 역사를 그 전과 후로 가르는 일대 사건을 겪고 난 뒤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반성한다. 우선 2024년 대한민국에서 친위쿠데타가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
평소 나는 민주주의 같은 제도, 집단의식 혹은 생활양식은 테크놀로지나 산업 같은 물질문화와 달리 불가역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왔다. 한 차례 진일보했다 하여 그 상태 그대로 이어지라는 법이 없으며 각 세대마다 자기만의 체험으로 다시 일궈나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지론을 스스로 철저히 이해했다면, 출범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제6공화국에서도 어느 곳에선가 민주정을 뒤엎으려는 모의가 준비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수미일관하지 못했고, 그래서 쿠데타 세력에게 무방비로 기습당하고 말았다.
또한 나는 반성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실체화할 가능성을 놓친 점을 반성한다.
나는 파시즘이란 "현대적인 극우 대중운동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집권 이후 실제로 기존 민주주의의 골간을 파괴하는" 이념-운동이라는 정리를 신뢰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파시즘이라는 복잡한 현상에 관해 지난한 논쟁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명쾌한 정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한국 사회에는 아직 본격적인 파시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극우 대중운동'은 없었지만,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요소가 전에 없던 공간, 즉 온라인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민주정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인 선거제도를 불신하게 만듦으로써 현존 대의기구 전반을 뒤엎어도 상관없다는, 아니 뒤엎어야 한다는 망상을 전염병처럼 퍼뜨리는 극우 유튜브 방송들이 있었다. 20세기 파시스트들과는 달리 21세기 온라인 극우 선동은 '비어홀 폭동'이나 '로마 진군'을 거치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대통령의 뇌와 곧바로 접속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국회를 타격하는 실체적 힘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과거와는 다른 요소와 역학을 통해 파시즘의 기본 요건을 충족시키는 이런 21세기 파시즘의 조짐을 제때에 포착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또 다른 중대한 잘못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절박한 과제가 국가기구의 철저한 민주화임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란 1987년 민주항쟁과 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직접투표로 선출하게 됐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는 분명 제4공화국, 제5공화국의 노골적 독재와 단절하는 새 출발이었지만,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되는 구조는 변함없이 지속됐다. 이 점에서 제6공화국은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만든 제3공화국 질서를 넘어서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군사쿠데타 이후 자리 잡은 국가기구 내의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구심들이 해체되지 않은 채 이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지속과 성숙을 바라는 논자라면, 바로 이 '불안하고 불완전한' 민주화를 직시하고 끊임없이 문제제기했어야 했다.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각 부처나 군대, 검찰, 경찰처럼 '합법적 폭력'을 다루는 기관에 도사린 비선출직 권력 구심들을 비판했어야 했고, 초집중적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이 구심들을 불순한 목적을 위해 동원할 잠재적 위험을 경고했어야 했다. 하지만 대통령 자신에 의해 내란이 '저질러진' 지금, 누구도 이 중대한 과제를 제대로 수행했다고 항변할 수 없게 됐다.
진짜 과제를 못 보게 가린 촛불 이후 7년의 잘못된 대립 구도
이 대목에서 반성은 집단적 반성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7년도 더 전에 촛불시위가 있었다. 12. 3 내란 사태를 통해 충격적으로 드러난 문제들은 이미 그때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든 쟁점들 안에 잠복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10년 가까이 지나도록 이 문제들은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문제들은 더욱 곪고 곪아 제6공화국을 새로운 독재 체제로 끝내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그래서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도대체 이 사회의 논의 지형에 어떤 약점과 한계가 있었기에 우리는 권력 심장부에서 이토록 치밀하게 반란이 기획, 실행되도록 방치하고만 있었던 것일까? 이른바 촛불'혁명'을 겪었다면서 어떻게 '내란 정부'를 탄생시키고 말았을까? 특히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나 같은) 이들일수록 이런 물음을 뼈아프게 던져야 한다.
여러 이유를 짚어야 하겠지만, 문재인 정부 후기에 굳어진 '검찰 개혁'을 둘러싼 담론 지형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조국 법무부장관을 둘러싼 논란을 겪으면서 촛불시민연합은 돌이킬 수 없이 분열됐다. 한 쪽은 '검찰 개혁'이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조국 장관 문제는 덮으려 했고, 다른 한 쪽은 조국 장관을 통해 드러난 한국 사회의 문제들(상위 중간계급의 대물림과 위선 등등)이 더 심각하다면서 '검찰 개혁'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두 입장 사이의 골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고, 촛불시민연합의 이러한 분열을 바탕으로 윤석열 정부가 탄생했다.
이렇게 양극화된 논의 지형이 문제였다. 우리 대다수가 그 안에 갇혀 정작 가장 커다란 위험이 커나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우선 조국 장관 논란을 계기로 촛불시민연합에서 이탈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선 이들의 경우는 '검찰 개혁'에 대한 관심까지 덩달아 거두고 말았다. 집권 리버럴 세력의 위선과 기만에 대한 비판이 잘못이었다거나 검찰 개혁의 세세한 방법론을 둘러싼 논쟁이 필요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의 '검찰 개혁' 시도에 한계가 있다 하여 이 과제 자체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으로 치부하거나 아예 망각한 전반적 분위기에 함정이 있었다.
도대체 '검찰'이라는 변수를 생략하고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87년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의 역사와 공직 경력을 함께 해온 인물이 어떻게 최고위 공직에 올라 '비상계엄' 자작극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징집마저 용케 피한 채 한 평생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인물이 어떻게 군사반란을 감행하고 대북 도발을 시도할 수 있었을까? 개인의 영달과 조직의 보위를 위해 짜맞추기 수사를 거듭하고 군대 같은 상명하달 체계로 움직이는 한국의 검찰 조직을 대입하지 않으면, 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다. 이런 점에서 12. 3 내란 사태는 우리를 다시금 '검찰 개혁'을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한 그 순간으로 돌려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 장관을 무턱대고 옹호하면서 '검찰 개혁'만 계속 부르짖은 쪽이 옳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근본적인 오류는 이 입장의 출발점이 된 문재인 정부의 정치 노선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를 자임했지만, 당시 한국 사회에서 시작됐어야 할 개혁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개혁'의 내용으로 '적폐 청산'을 내세웠다. 겉으로는 통쾌하게 들리지만, 현실에서 이는 전임 박근혜 정부 최상층 인사 몇 명에 대한 사법적 심판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는 기존의 초집중적 대통령제 구조에 손을 대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철저히 활용했고, 가령 윤석열이 이끄는 검찰 조직을 그 충실한 손발로 삼았다. 당장은 이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기울어진' 양당 구도가 유지됐기에 촛불 이후 한국 사회가 별 문제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다음 과제로 '검찰 개혁'을 꺼내들자 상황이 돌변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개혁'의 시대적 과제로 국가기구 전반의 민주화를 추진한 게 아니라 국가기구 안에서 '합법적 폭력'을 담당하는 여러 기관 중 하나인 검찰만 따로 떼어 개혁 대상으로 부각시켰다. '기울어진' 양당 구도에서 강자의 위치에 선 정부-여당이 이런 식으로 '검찰 개혁'의 시동을 걸었기에 이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공세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만 했다. 게다가 여기에 조국 장관을 둘러싼 논란까지 더해지자 촛불시민연합은 모두를 당혹케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지난 몇 년을 복기하는 것은 이제 와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친위쿠데타 발발에 이르기까지 어느 쪽이 더 책임이 무거운지 판결해보자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 내란 사태 앞에서 이런 평가는 아무 의미도 없다. 처참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 모두는 이런 무참한 실패를 낳은 생각과 감정, 말의 지형에서 일단 벗어나야 한다. 다 함께 새 출발의 지반 위에 서야 한다.
뒤늦게라도 민주화의 두 번째 단계를 열어야 한다
무엇이 새로운 출발의 지반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1987년에 이뤄진 최소한의 민주화 이후 미루고 미뤄온 국가기구 전반의 철저한 민주화(민주화의 두 번째 단계)를 공통 과제로 삼아 모든 논의와 실천을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국가기구의 민주화'가 뜻하는 바다. 제6공화국 내내 끈질기게 이어진 기대와는 달리, 이는 직선 대통령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이를 통해 관료기구 전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일 수 없다. 이런 기대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을뿐더러 윤석열 같은 최첨단 파시스트에 의해 정반대 방향에서 구현될 가능성마저 있음이 드러났다.
그렇다고 검찰처럼 횡포가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특정 관료기구를 가려내 손보는 것일 수도 없다. 검찰만이 아니라 경찰, 군대 내 정보조직 등으로 개혁 대상의 숫자를 늘려봐야 마찬가지다. 위험도가 높은 관료기구의 개별적 개혁은 최소한의 부분적 조치일 뿐이다. 12. 3 내란에서도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런 기관들을 비밀리에 서로 엮어 강력한 반민주 세력을 구축한 최상위 권력에 있었다.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기구 전반의 얼개와 작동방식을 뜯어고쳐야만 하는 이유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맞는 '국가기구의 민주화'란 다음 두 가지 요건의 결합일 것이다. 첫째, 권력은 최대한 분산되어야 한다. 국가기구 내에서 국회로, 지방정부로 분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의 국가기구를 넘어 시민사회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둘째, 그렇게 분산된 권력 구심마다 대중의 일상적 영향력이 관통해야 한다. 대중은 다양한 권력 구심에 대한 다양한 통제 방식을 통해 민주주의를 더 깊이, 더 넓게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러한 방향에서 국가기구의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는 물론 12. 3 내란의 최종 진압, 윤석열을 비롯한 내란 세력의 철저한 단죄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성장한 조숙한 파시즘에 대한 첫 번째 결정적 반격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국가기구 민주화의 다음 국면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파시즘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
이런 다음 단계 과제로는 개헌이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개헌으로 모든 내용이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국가기구 민주화는 사회대개혁, 사회대전환과 별개의 과제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둘이 실제로 긴밀히 결합하려면 상당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 모든 어려운 도전을 위해 이제 우리는 제2단계 민주화의 통합적 전략을 고민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도 지난 7년의 분열, 도착, 혼란과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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