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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안중근 장군은 이를테면, 이 한 줄에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하다. 그런데 ‘인간 안중근’은 이 한 줄에만 있지 않다. 영화 ‘하얼빈’은 그동안 비치지 않았던 그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얼빈’은 제목 그대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안중근 장군(현빈)를 비롯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안중근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안중근 장군은 포로가 된 일본군을 ‘죽이자!’라는 의견과 달랐다. 그는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를 석방했다. 그리고 그 석방된 일본 군인은 독립군의 뒤를 쳤다. 안중근 장군은 수많은 동지를 잃고, 본거지까지 힘든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안중근 장군의 발을 다시 내딛게 한 것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었다. 안중근 장군은 동지들이 지켜준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없었다. 대신 결심한다. “늙은 늑대를 반드시 죽여 없애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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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은 크게 두 지점으로 구분된다. 한 지점에서 안중근 장군은 실패했고, 다음 지점에서 그로 인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나아간다. 그런데 그 지점이 독특하다. 보통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구성되는 전투 장면이 초반에 있다. 그 신아산 전투는 웅장하기보다 처절하다. 새하얀 눈은 전투에 그 빛을 잃는다. 사람의 피로 달궈져 진흙밭 위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뒤엉켜 싸운다. 처절한 승리, 뒤이은 처절한 패배, 이는 안중근 장군의 실패와 연결된다. 그리고 안중근 장군이 늙은 늑대(이토 히로부미)의 척결을 결심한 이후, 거사 7일 전 상황부터 그날까지를 기록한다. 그 과정을 통해 독립 투사들의 관계성이 비친다. 포로를 석방해야 한다는 안중근 장군(현빈)과 철저하게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이창섭(이동욱), 늘 배고픈 우덕순(박정민), 통역을 담당해 온 김상현(조우진), 남편을 잃고 독립군이 되어 삶을 이어가는 공부인(전여빈), 러시아에 적을 두고 물심양면 지원하는 최재형(유재명) 등은 거사를 계획한 순간부터 7일 동안 목숨을 걸고 나아간다.
현빈의 안중근 장군은 두려움이었고, 죄책감이었다. '하얼빈'을 차기작으로 결정한 순간부터 촬영 마지막 날까지 그 무게감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한 현빈은 이를 그 누구보다 몸으로 표현했다. 그의 들숨과 날숨에는 공포가 있었고, 빛이 드는 창을 등지고 어둠으로 움츠리는 몸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영웅'이 아닌 '사람'이 현빈의 안중근 장군이었다.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가는 안중근 장군의 뒷모습은 마치 우리의 핏줄 위를 걸어가는 차가운 뜨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하얼빈'의 말미, 얼어붙은 강 위에 선 안중근 장군의 앞모습에는 염려와 당부가 있었다. 불을 밝히고,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현빈은 온몸을 이용해서 그만의 안중근을 표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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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를 하얼빈으로 갈 수 있게 묵묵한 희생을 감내한 독립군 '동지'들은 각자의 색으로 '하얼빈'을 굳건하게 지탱한다. 밀정이라는 요소는 우민호 감독의 말처럼 "'하얼빈' 속 유일한 오락적 요소"가 될 수 있다. 빛까지 흔들리는 열차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밀정의 모습은 작품 속 긴박감을 더한다. 또한, 밀정까지도 과거 영화 '암살', '밀정' 속 밀정과는 또 다른 온도로 담아내 시대상이 서걱거리게 곁든다.
안중근 장군과 독립군은 열차 위 조명처럼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눈발이 날리는 상황 속에서도, 강추위에도,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 모습처럼 영화 '하얼빈'의 촬영도 진행됐다. '하얼빈' 속에서 내리는 눈은 하나도 CG가 없다. 기다림과 간절함의 몫이었다. 스크린을 바라보며 느끼는 '숭고함'은 그렇게 현장에 임했기에 꾹꾹 눌러 담겼다. '하얼빈'은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한 장면에 멈추고 캡처를 하더라도 그림 같은 비주얼로 숭고함을 더한다. 대자연, 빛과 그림자, 그리고 연기까지도 숨을 멈추고 스크린에 눈과 귀를 집중하게 한다. 한국 최초로 시도한 아이맥스 비율은 '최초' 이상의 몫을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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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속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조선의 왕도, 신하도 아닌 받은 것도 없는 백성들이었다. 메인 예고편에서 나온 일부 대사인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온 나라지만,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라는 말은 혼란스러운 현 시국에서 각자의 불빛을 든 아스팔트 위의 시민들과 맞물려 더욱 뜨거운 온도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국민인데'라는 자긍심을 일깨운다.
신파가 아니다. 두려웠고, 암담했고, 그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뜨거워졌던, 현실이다. '하얼빈'의 인터내셔널 포스터 속 'FOR A BETTER TOMORROW(더 나은 내일을 위해)'라는 말처럼 영상미 속에 담긴 뜨거운 진심은 12월 24일 개봉하는 영화 '하얼빈'에서 만날 수 있다. 이는 영화 '서울의 봄'을 만든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의 작품이기도 하다. 러닝타임 113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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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