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시작할 때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무척 강하게 들었어요.
다른 게 하고 싶다,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욕구가 있었어요.”
단단하게 구축해온 자신의 성을 허물고 새로운 나를 찾아냈다.
넷플릭스 화제작 <트렁크>의 ‘인지’를 완성한 후
배우 서현진에게 새로이 다가온 변화들.
이 아이가 말로만 듣던 반려견, ‘시더’군요.
맞아요. 나름 넷플릭스 출연견.(웃음) <트렁크> 마지막 장면에 나옵니다.
둘이 닮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웃음)
<트렁크>, 저는 좋았어요. 중간이 없이 ‘좋다’와 ‘싫다’ 양극단의 반응만 있는 드라마라 출연 배우와 대화를 나누기 전에 제 의견을 미리 피력해야겠다 싶어요.
다행이에요. 취향에 맞는 분들은 재미있게 보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미리 얘기하자면, 같은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이 작품이 반가웠어요.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이 내 필모그래피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반갑고 기쁘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잘 봐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가 돼요. 아니면 아닌 거잖아요. 취향이란 게 그런 거니까요.
넷플릭스 작품 특성상 보는 장소와 기기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잖아요. 어디서 무엇을 통해 봤어요?
작품 관련 인터뷰를 해야 하니까 드라마 공개 2주 전에 배우들에게 미리 볼 수 있는 경로를 열어주거든요. 그때 한 번 보고, 공개일에 맞춰 한 번 더 봤어요. 11월 29일(공개일)에는 집에서 아이패드로 혼자 봤어요. 누구랑 같이 보기엔 어쩐지 좀 쑥스러워서요.
마지막 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어떤 마음이 들었어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그 결말을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좋았고, 호오를 떠나서 이 작품의 만듦새를 감독님과 배우들은 모두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런 면에서 안심 되는 부분이 있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시더가 나온 장면이 편집되지 않아 흐뭇했죠.(웃음)
은유적 표현이 많은 작품이라 보면서 궁금한 게 많았어요. 관객과의 대화(GV) 자리가 없을 것 같아, 여기서 물어볼게요. 우선 그 트렁크요, 무엇이 들어 있었어요? 꽤 무거워 보이던데.
상당히 무겁습니다. 그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트렁크>를 위해 만들어진 트렁크거든요. 안에 뭐가 있었을 것 같아요?
글쎄요. 인지가 축구 보는 것도 좋아하고, 주짓수를 배운 적이 있고, 카약도 타니까… 운동과 관련된 장비들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드라마에 나오진 않지만, 트렁크 속을 세팅한 적이 있어요. 물론 옷도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중요한 건 전기 충격기와 삼단봉이었어요. 태성(김동원)에게 오랜 시간 스토킹을 당했잖아요. 그에 대한 두려움, 살고자 하는 절박감의 산물을 항상 지니고 있었던 거죠.
그럼 인지가 정원(공유)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였다고 생각하나요? 계약 결혼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결국 서 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잖아요.
언제라고 보셨어요?
저는 경직을 놓아버리는 순간이요.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던 두 사람이 툭 하고 풀어지는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정원에 대한 호감은 당연히 대학 때부터 있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연히 마주친 그 순간들이 둘에겐 너무나 특별했을 테니까요. 납골당, 버스, 대학교 강당에서 마주친 그날이 인지와 정원 모두에게 무척 힘든 날이었잖아요. 시간이 한참 흘러서 만났지만, 그날의 서로를 몰랐을 리 없어요. 그리고 인지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건 당신이랑 자고 싶은 것 같다는 정원의 말에 “알아둘게요”라 답한 순간인 것 같아요. 그 답이 듣는 사람 입장에선 ‘노’ 혹 은 ‘세이브’ 정도가 될 수 있는데, 인지에게는 사실 ‘예스’에 가까운 대답이거든요. 그런데 연기하면서는 그 마음을 확 보여주려 하진 않았어요. 그 장면을 촬영할 때 감독님이 “조금만 더 표정을 보여주면 안 돼? 호든 불호든 뭔가 더 드러내주면 안 돼?”라고 하셨는데, 저는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어요. 긴가민가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쉽지 않네요, 인지는.(웃음)
보통이 아니죠.(웃음)
인지는 늘 말을 내뱉기보다 삼키는 쪽을 택해요. 그래서 보는 내내 마음속에 어떤 말들을 품고 살았을까 생각했어요.
모르겠어요. 실은 그래서 인지가 더 좋았어요. 그렇게 삼키고, 그 정도의 말만 하는 사람이라서요. 생각해보면 인지가 처음부터 그렇게 말이 없진 않았을 거예요. 도하(이기우)랑 만나던 과거 장면을 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잖아요. 도하에게 사회적 살인을 한 것 같은 그 마음 때문에 말이 없어진 것 같아요. ‘내 탓이야’ 하고 자책하면서요. 이건 작은 힌트인데요, 본래의 인지를 알고 싶다면 컬러를 보면 돼요. 감독님이 캐릭터마다 부여한 색이 있는데, 인지의 색은 빨강이에요. 그래서 카약도 빨간색이고, 중간중간 빨간색 옷이나 액세서리를 하고 있어요. 그 색처럼 원래는 불꽃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준 거죠.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말인데요. N차 관람을 유도하는 고도의 수가 아닌가 싶고요.(웃음)
다시 보면 각 인물의 색이 군데군데 보일 거예요. 인지는 레드, 정원은 그레이, 서연(정윤하)은 블루. 감독님이 색으로 디렉팅을 한 적도 있어요. 정원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열렸고 그에게 물들었다는 느낌으로 그레이를 입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신도 있어요. 굉장히 섬세하십니다.(웃음)
<트렁크>를 준비하는 과정에 대한 얘기 중에서 무척 인상 깊은 말이 있어요. 필사적으로 연습을 피했다는 말이요.
그 얘기 괜히 한 것 같아요.(웃음) 누군가는 ‘그 정도는 아니던데’ 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그냥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무척 강하게 들었어요. 이러면 너무 뻔해질 것 같다. 나도 이렇게 익숙하다고 느끼는데 보시는 분들은 더하지 않을까? 다른 게 하고 싶다,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욕구가 있었어요. 거기서부터 출발했고, 그럼 연습을 안 해보는 건 어떨까 싶었던 거죠. 그게 대본도 안 본다는 게 아니라, 성실히 탐구는 하되 입에만 붙지 않게 해보는 시도였어요. 이렇게 여백이 많은 대본이 별로 없어서, 지금이 아니면 이처럼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연기를 못 해볼 것 같았거든요. 사실 속내는 일단 안 해보고, 첫날 찍어본 다음 ‘감독님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다시 하던 대로 연습해야지’ 그랬어요.(웃음)
정확히 말하면 안 하기를 연습한 거군요. 본능적으로 표현되는 무언가를 위해서요.
그게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힘들더라고요. 가려던 방향에 가속도가 붙었는데 탁 잡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많이 울었어요. 무섭고 불안해서.
그렇게 참고 참아서 첫 대사를 내뱉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잘 안 해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바로 체감하진 못했어요. 첫날은 대사가 많지 않고 표정을 타이트로 잡는 신이 대부분이었는데, 감독님 이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대로 가면 되겠다고요. 그 말에 일단 안심했고 도전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끝까지 불안하긴 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은 계속 좋다고만 하시니까 다 찍고 후시녹음 할 때 제작 스태프들한테 가서 괜찮으냐고 여러 번 물어본 기억이 나요. “진짜 괜찮아요?” 그러면 “괜찮은데, 왜요?” 그러고도 못 믿어서 “진짜로요?”라며 재차 묻고야 마는 거죠.
20년 넘게 연기를 하며 자신의 방식을 구축해온 배우가 갑자기 새로운 걸 해본다는 게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거 예요. 불안이 따를 수밖에 없죠.
한편으론 입에 붙지 않게 해보는 게 얼마나 대단히 새로운 일인가 하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좀 머쓱해요.
해보니까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 얻은 것도 있고, 작은 변화도 생겼어요. 인지도 정원도 결국은 자신의 일상을 회복하잖아요. 그 엔딩에 제 도전도, 그리고 삶도 약간 응원을 받은 기분이 들었어요. 당시엔 몰랐는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올해 왜 이렇게 안 하던 걸 많이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게 인지한테 영향을 받은 것 같더라고요. 이사를 했는데 짐을 4분의 3쯤 비워냈어요.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도 좀 정리했고요. 여러모로 긍정적인 동력이 된 것 같아요.
인지라는 캐릭터, 그리고 <트렁크>를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까요?갈망하던 변화를 이제야 마주했다는 점에서요.
모든 작품이 그런 것 같아요. 할 사람이, 할 때에 한다. 왜냐하면 저는 캐스팅에서 1순위가 아닌 적이 많았고, 또 하게 된다고 해도 원하는 상황이 모두 마련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당시의 고민이 담긴 대본을 손에 쥐려 애쓴 것뿐일 테고요. 그래서 지금이 딱 좋은 때라고 생각해요.
연기를 대하는 마음도 변했나요?연기를 사람으로 치환해보면,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하하, 비즈니스 관계요. 사랑인 줄 알았는데요. 사랑이고 싶지 않아요. 사랑보다 신뢰가 있는 관계이고 싶어요. 최근에 라미란 언니가 <트렁크>를 다 보시고 ‘너 연기 사랑하네’라고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내셨어요. 거기에 ‘사랑… 하나요?’ 이렇게 답을 했는데, 사실은 너무 좋아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은 즐거운 놀이 상대이자 건강한 비즈니스 파트너이길 바라요.
이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배우가 아닌 나의 삶도 잘 살아야 한다.’ 이게 제 목표예요. 사실 이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했는데 잘 못 산 때가 훨씬 많았어요. 작품 하는 동안 일상의 서현진은 없어요. 제가 집안일을 아주 좋아하는데 연기할 땐 아예 안 해요. 안 빨면 입을 옷이 없어서 겨우 빨래를 할 정도로 완전히 다 방치하는 거예요. 중간중간 쉬는 날은 좀 건강하게 나의 일상을 찾고 그래야 하는데, 촬영이 없으면 고무줄 쫙 당겼다가 탁 튕기면 확 쪼그라드는 것처럼 침대에만 붙어 있고요. 작품 할 때의 나와 안 할 때의 나, 두 가지로 완전히 분리했던 거죠. 그런데 오랫동안 자신의 길을 걷는 감독님과 선배님을 보니까 그게 다 합쳐져 섞여 있더라고요. 어느 때부턴가 그 모습이 이상적으로 보였어요. 굳이 분리하지 않고 자신의 삶도 연기자로서의 삶도 자연스럽게 두는 모습이요. 그게 연륜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도 그리로 가고 싶고요.
이 관계의 끝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있나요?
늘 생각해요. 저는 직업이 여러 번 바뀌었거든요. 그래서 연기를 계속 하고 싶지만, 언제든 또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생이 모두 다 자의에 의해 흘러갈 순 없으니까요. 어떤 이유로 연기를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늘 생각해요. 다른 거 하면서도 뭐 잘 살 거예요. 죽진 않겠죠.(일동 웃음) 그래서 사랑하면 안 돼요. 너무 사랑하는데 못 하게 되면 너무 힘들 거 아니에요.
이제 보니 애써 사랑하지 않으려는 것 같은데요.(웃음)
굉장히 사랑한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그보단 가볍게 놀이 상대, 좋은 파트너로 바라보고 있어요. 다만 그 놀이에 꼭 즐거운 것만 있지 않다는 건 알아요. 괴로움도 있고 고충도 있을 거예요. 또 그조차 즐길 수도 있잖아요. 고통을 즐기는.(웃음) 결국 어떤 마음이든 다 품고 계속 건강하고 즐겁게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