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고영미 기자] 12.3 비상계엄에 탄핵소추안 가결로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정지가 확정되자 국정 주도권을 쥐려는 여야의 기싸움이 치열하다.
국정 전반의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은 대여 공세를 중단하고 ‘정국 안정화 모드’에 돌입했다. 이재명 대표는 민생·경제 행보를 보임과 동시에 국민의힘을 향해서는 “이제 여당이 아니다. 야당도 없다”고 직격탄을 날리며 민주당이 탄핵 정국에서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국민의힘 권성동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이 대표를 향해 “대통령 놀이에 빠지지 말라”고 맞받아치며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잇달아 접견하는 등 여당 지위를 잃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하고 있다.
이재명, 보수+중도층 공략 나서
민주당은 윤 대통령 탄핵 가결 이후 야당이 아닌 ‘제1당’으로 정국 안정화에 나선다는 모양새다.
민주당은 국정안정협의체에 반발하는 여당을 달래는 한편 그간 남발해온 고위공직자 탄핵 카드도 무기한 보류시켰다.
이 대표는 연일 민생·경제 행보에 집중하는 한편 '개딸'로 불리는 강성지지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재명이네 마을' 이장직을 내려놨다. 윤 대통령 탄핵 이후 갈곳 잃은 중도 보수층의 마음과 중도층 민심을 공략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권행보는 외교 안보로도 확장됐다. 이 대표는 지난 16일 오후 국회를 찾은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암참) 이사진과의 면담에서 "미국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나라다. 대한민국과 미국 간 관계는 혈맹을 넘어 경제적, 총체적 동맹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굳건한 한미동맹을 연신 강조했다. 2021년 대선 출마 직후 "대한민국은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의 합작으로 깨끗하게 출발하지 못했던 나라"라는 이른바 '미 점령군' 발언으로 한미동맹에 반감을 드러냈던 것과 달라진 태도다.
이 대표는 지난 15일 "이제 여당이 어딨느냐. 제1당과 제2당만 있다"고 선전포고를 날리면서도 이튿날인 지난 16일에는 "국회와 정부가 함께하는 국정안정협의체"를 제안하기도 했다.
실제 이 대표의 이날 최고위원회의 메시지는 집권 여당 대표나 국가 최고지도자의 발언을 연상케했다. 이 대표는 "국정 안정과 민생 회복에 내편과 네편이 어디 있느냐"며 "국정 전반에 대한 협의체 구성이 부담스럽다면 우선 경제와 민생 분야에 한정해서라도 요청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 12일에는 종교계와 재계를 연달아 만났다. 정순택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예방해 정국 현안에 대한 얘기를 나눈 데 이어 김기문 중기중앙회장, 손경식 경영자총협회장, 송치영 소상공인연합회장 등 경제단체 대표들과 긴급 간담회를 했다.
이 같은 광폭행보는 8년 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후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지난 2016년 12월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 대표는 "이번 사태의 머리는 박근혜, 몸통은 새누리당, 뿌리는 재벌"이라며 "박정희가 만든 재벌이 이 나라를 지배해 왔다. 이제는 재벌도 법의 지배를 받는 평등함을 보여줘야 할 때"라며 재계를 향한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민주당은 아예 여당모드로 민생입법은 물론 내년도 추가경정 예산까지 논의하겠다며 나섰다. 민생경제회복단도 꾸려 다양한 민생 입법으로 국정 안정을 도모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헌법상 정부의 권한인 예산안 편성까지 민주당이 손을 대고 나선 것으로 여야의 공수가 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함께 무더기 탄핵 카드도 일단 보류 시켰다. 국정 혼선을 우려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 카드를 접은 데 이어 11일로 예정됐던 강백신·엄희준 검사의 탄핵 청문회도 무기한 연기했다.
오세훈 “李 ‘상왕 놀이’에 심취해 있어”
보수 정치권에선 잇단 사법리스크로 낭떠러지에 몰렸던 이 대표가 예기치 못한 비상계엄 사태로 기사회생한 것도 모자라, 비상계엄에 대한 악화된 여론을 등에 업고 대권을 잡은 듯 행동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17일 기업 활동을 제한한다는 우려가 제기된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국회증언법) 개정안'이 야당 주도로 통과된 것과 이 대표가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암참) 이사진을 만나 '대한민국에 투자할 기회'라고 말한 것을 들며 "이재명식 이중 플레이"라고 비판했다.
오 시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입으로는 경제 살리기, 행동은 경제 죽이기'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이재명식 이중 플레이가 도를 넘고 있다. 어제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을 만나 '대한민국을 저가 매수할 기회, 투자할 기회'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 뒤로는 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의회 폭거를 멈추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 시장은 "정국 불안정으로 경제와 외교적 리스크를 완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묻지 마 탄핵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대통령이 된 듯 '상왕 놀이'에 심취한 이재명 한 명의 존재가 한국 경제와 정치의 최대 리스크"라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 행사를 하면 탄핵하겠다고 겁박하는데 경제 죽이기 법안을 그대로 통과시키면 그게 오히려 직무 유기"라고 했다.
이와 함께 '이재명 대표 저격수'로 불렸던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 10일 이 대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윤 전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물 만난 듯 대통령 놀이를 시작한 이 대표, '이재명은 계엄보다 더한 짓도 할 인물'이라며 불안해하는 국민들이 많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이 대표 수사나 민주당 조사와 관련한 보복성 탄핵이 이 정부 들어 24번이다. 여의도는 이미 조폭 정치가 돼 있었다. 그래 놓고 지금 점령군인 양 달려들고 있다"며 "대통령 직무정지 시 권한대행을 맡아야 할 총리를 비롯해 국무위원 줄줄이 탄핵하려 한다. 안정은커녕 국가를 무정부상태로 만들어놓는 게 유리하다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비판했다.
권성동, 야당 빼고 국정 주도권 잡기
이 대표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를 향해 ‘대통령 놀음’이라며 비판했던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도 각 부처 장관들을 만나 국정 현안 점검에 나서는 등 국정운영 주도권을 잡기에 나섰다.
다수 야당의 도움 없이는 국정운영을 어려운 상황인데도, 친윤계가 여전히 국정운영 주도권 잡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권 대행은 1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내년 1월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미 동맹, 대북정책, 외교, 통상, 에너지를 포함해 꼼꼼하게 준비해야 할 현안이 많다”며 “앞으로도 국민의힘은 집권 여당으로서 긴밀한 당정 소통을 통해 한 치의 국정 공백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중요한 국정 현안들을 차질 없이 추진할 수 있도록 공직자들이 흔들림 없는 행정을 해줄 것을 당부한다”고도 했다.
권 대행은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부터 한덕수 대행과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만나 감액 예산 문제와 2025학년도 대학 입시 상황을 점검했다. 이어 김완섭(환경부)·조태열(외교부)·김영호(통일부)·안덕근(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 국정 현안 점검에 나섰다. 김상훈 정책위의장은 “이번주부터 고위당정협의회(20일)를 시작으로 상임위원회별·현안별 실무·각급 당정협의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권 대행은 지난 16일 ‘국회와 정부가 함께하는 국정안정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이 대표의 제안을 거부하며 “이재명 대표는 벌써부터 대통령이 다 된 듯한 대통령 놀이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고 일축했다.
또한 이날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로 열린 양당 원내대표 회동에서도 “국민의힘은 아직도 여당”이라며 “여당이 정부 총리나 장관들과 당정협의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권 대행의 행보를 두고 당 안팎에선 한동훈 대표 축출에 성공한 친윤계가 야당을 제외한 채 사실상 국정운영 전면에 나서겠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친한동훈계에서는 권 대행의 행보에 대해 친윤들이 득세하는 모습이 오히려 국민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탄핵된 만큼, 국민의힘 역시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는 입장이다. 또한 한덕수-권성동 두 대행 체제’가 ‘한덕수-한동훈 공동 국정운영 체제’와 다르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언론과의 통화에서 권 대행이 민주당과는 협의하지 않고 한 권한대행을 만나 여권 행세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앞서 권 대행은 지난 16일 이 대표의 행보를 겨냥해 "벌써부터 대통령이 다 된 듯한 대통령 놀음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라며 "재의요구권이나 임명권이나 모두 대통령 권한 중 일부"라며 "한 권한대행 체제는 '이재명의 섭정 체제'가 아니다. 이 대표는 권한대행의 권한 행사 범위에 대해 제멋대로 유권 해석하지 마라"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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