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과 맞물려 한국 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내수 부진과 수출 성장세가 둔화되는 등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1%대로 주저앉을 모양새다. 내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2기의 출범에 따른 고관세, 무역전쟁 심화로 수출 하방압력이 높아진다는 우려다.
이에 대기업들은 탄핵정국을 예의주시면서 내년 경영 계획 수립에 집중하고 있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데 따른 것이다. 정부도 민관 합동 실물경제 비상 전략회의를 가동하면서 저성장에 대응할 태세다.
한국경제 저상장 국면으로 ‘진입’
18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달 카드 승인액은 전년 동월 대비 2.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는 올해 전체적으로 보면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승용차 판매량과 백화점 카드 승인액은 각각 1.7%, 5.5% 감소하는 등 상품 소비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수출은 1.4% 느는 데 그쳐 10월(4.6%)보다 증가폭이 크게 둔화됐다.
한국 기업들의 성장성도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범용 반도체의 더딘 수요 회복 영향에 따른 것이다.
한은의 ‘2024년 3분기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올해 7~9월 대표적인 성장성 지표인 국내 외감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전년 동기대비 4.3%로 전분기(5.3%)보다 감소했다.
제조업 매출액증가율은 7.3%에서 4.9%로 떨어졌다. 기계 및 전기전자는 20.7%에서 13.7%로 크게 낮아졌다. AI 관련 반도체 수요 증가와 수출단가가 상승했음에도 PC·스마트폰 등 범용 반도체의 더딘 수요 회복 등으로 증가세가 둔화됐다. 석유·화학은 6.6%에서 -1.0%로 감소했다.
강영관 한은 경제통계국 기업통계팀장은 “중간재 투입 비중이 대부분 높은 업종의 수익성은 환율 상승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질 위기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통화정책 당국인 한국은행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9%로 내려잡았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1.8%로 하향 조정했다.
한국의 성장엔진이 꺼지는 주된 이유로 인구 고령화가 꼽힌다.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최근 “우리나라는 내년부터 1년에 약 1%포인트씩 고령인구가 증가해 2035년에는 고령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30%를 넘고 2045년에는 그 비중이 37.3%로 고령인구 비중 세계 최고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저성장에 허덕이는 유럽은 현재 1.46명의 합계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지난해 0.72명까지 추락했다. 청년 등 생산가능인구가 크게 줄어들면 경제는 더 이상 성장할 수가 없다. 혁신의 주체 청년이 있어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창업을 한다. 또 청년들이 많아야 새로운 상품이 나왔을 때 이를 먼저 써보고 평가하는 테스트 마켓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신제품을 만들고 테스트할 주체가 사라진 셈이다.
성장률이 떨어지면 고용시장도 타격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등 취약계층에게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된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내년 취업자 수 증가폭이 14만명으로 올해(18만명)보다 낮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대기업 내년 경영전략 짜기 ‘분주’
이런 저성장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재계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삼성, SK, 현대차, LG 등 국내 주요 기업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정국 상황을 살피면서 실물경제 움직임과 금융시장 동향에 주목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다”며 “향후 조기 대선과 미국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등 대내외 변수에 대응하는 내년 경영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형 변수가 있는 만큼 기업들이 과감한 투자보단 보수적 접근 방식으로 ‘안전운행’식 경영전략을 펼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는 17∼19일 글로벌 전략회의를 열었다. 국내외 임원급이 참여해 사업 부문·지역별로 현안을 공유하고 내년 사업 목표와 영업 전략 등을 논의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주 장재훈 현대차 사장과 송호성 기아 사장 주재로 글로벌 권역본부장 회의를 열고 올해 사업 성과와 내년도 계획을 점검했다.
LG그룹도 지난 12일 구광모 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이 모여 사장단 협의회를 열고 내년 중점 추진 과제 등 경영전략을 논의했다.
특히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요동치는 등 금융시장 변동성이 증폭된 만큼 기업들은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1430원대까지 급등한 환율이 수입가격 상승을 불러 수출기업의 채산성을 떨어뜨리는 현상은 수출의 해외의존도가 높을수록 심하게 나타난다. 수출의 해외의존도란 수출을 위해 원자재와 중간재 등을 수입에 의존하는 정도다.
한국의 제조업 중 정유, 식품, 제지, 철강부문 등이 원자재를 해외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 정유사가 들여오는 원유는 100% 수입품이다. 청갈 부분의 경우 원자재의 절반 이상을 수입한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내수 부진과 중국산 저가 철강재 공급 과잉 문제로 업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데 환율 급등으로 원자재 수입가격까지 올라 생산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하루 빨리 불확실성이 해소되길 바랄 뿐이다”고 토로했다.
항공업계도 환율과 항공 여객 수요 변동 등이 재무와 영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 면밀히 점검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고환율 등의 영향이 있을 수 있어 추이를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고 24시간 오퍼레이션 체제로 안전 운항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정부, 민관 공동으로 불확실성 ‘대응’
정부도 경제계와 전방위로 접촉하면서 경제적 불확실성 최소화를 위한 공동대응에 나섰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6일 오전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경제6단체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기업 경영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상근부회장, 이인호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이 참석했다.
최 부총리는 간담회에서 “경제팀은 해야 할 일들을 흔들림 없이 신속히 해나가겠다”며 “대외신인도를 최우선으로 철저히 관리하고, 통상환경 불확실성에도 적극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민생경제 안정과 우리 산업의 미래를 준비하는 정책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업 경영활동이 위축되지 않고, 투자·수출·채용이 정상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해달라”며 “산업경쟁력 강화 측면에서도 경제단체들이 적극 참여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경제단체 대표들은 “국정공백 최소화와 정책의 안정성·연속성 유지가 중요하다”며 “경제팀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기재부는 전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민관 합동 실물경제 비상전략회의’를 가동하면서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있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지난 17일 회의에서 “산업부는 기업 지원의 최후 보루로, 흔들림 없이 산업·통상 정책을 추진하겠다”며 “민관 원팀으로 불확실성에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업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우려 요인과 기회요인을 면밀히 분석해 부정적 영향은 최소화하고 상호호혜적 한미 관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산업부는 앞으로 실물경제 동향을 긴밀히 모니터링하고 현재 추진중인 첨단산업 육성, 공급망 강화 등의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수출기업이 예상치 못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무역금융을 강화하고, 기업의 적극적 투자와 외국인 투자 유입을 위한 규제개선과 기업지원 체계 구축도 지속 추진키로 했다. 아울러 환율 급등에 따른 국내 에너지 가격을 모니터링하고, 에너지 수급 및 관련 시설의 정상 가동에 문제가 없도록 일일 점검체계를 철저히 유지할 방침이다.
이날 회의에는 정부측에서 안 장관을 비롯해 박성택 1차관, 최남호 2차관,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 등 산업부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업계에선 이인호 한국무역협회 부회장과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이호준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등 경제단체 임원들과 반도체협회, 배터리협회, 조선해양플랜트협회, 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바이오협회, 철강협회 등의 임원 등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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