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 세계이주민의 날(International Migrants Day)이다. 이 날은 1990년 12월 18일, 유엔총회가 전세계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을 채택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0년부터 제정한 날이다.
대한민국의 이주민은, 법무부 통계에 의하면 2024년 10월말 현재 269만명으로, 향후에는 600여 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도 하고 있다. 향후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에 보이는 이주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주민들,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이주아동청소년, 그리고 고령화된 이주민들과 생활을 같이 하며 동고동락하며 일생을 함께 보내게 될 것이며, 우리의 후세대에는 이주배경의 후손들이 즐비하게 될 것이다.
이주민의 숫자만이 아니라 그 구성도 다양해져가고, 그에 따라 이주민 관련 법률과 정책도 다양해졌다. 이주민에 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지원도 갈수록 많아지고 풍부해졌다. 이제 이주민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부족한 노동인력보완을 넘어 공동체의 본질을 변화시킬 정도로 지대해져가고 있다.
이주인권활동을 하면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이주민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청소년인 10대 중반에 한국에 왔고, 성인이 되었고, 가정을 이루었고, 이제 중년이 된 이주노동자이다. 그이가 한국에 들어왔던 그 시절, 비자 없는 미등록아동은 공교육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10대 소녀는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어린 나이에 취업하였다. 그렇게 성장하였고, 같은 조건의 외국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았다. 부모가 비자가 없으니 아이들도 비자를 받을 길이 없어 이들 일가족은 모두 비자 없는 상태였지만 열심히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그이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나이대가 되었을 때는 일하는 공장의 사장님이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입학을 요청하고 설득하면서 간신히 학교를 들어갔고 다닐 수 있었다. 법무부가 2021.2022년 장기체류 미등록아동의 합법화조치를 시행하면서 아이들은 비자를 받았고 지금은 신나게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40대가 된 그이와 남편은 한시적이지만 체류를 허가받고 열심히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생활비와 아이들 교육비를 벌고 있다. 그리고 20년만에 고향에도 한번 갔다 왔다. 그들의 가정에 별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이와 남편은 노동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할 것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성장하여 이 땅의 청년노동자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이의 손자녀들도 이 땅에서 성장할 확률이 매우 높다. 한국이 내쫓지만 않는다면.
대한민국이 키워낸 이주배경청소년들
그이의 가족만이 아니다. 세대를 이룬 이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어엿한 청년이 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 중에는 그이의 자녀들처럼 비자를 받은 청년들도 있고, 운 나쁘게 뭔가 조건이 맞지 않아 비자를 받지 못해 인생 사이클이 꼬여버린 청년들도 있다.
우리 사회는 불과 40여일전인 11월 8일, 32세의 몽골인 청년(고 강태완씨의 명복을 빈다!)이 당한 안타까운 산재사망사고에 대해 함께 슬퍼하고 아파했다. 잠시나마 우리 사회는 고인의 짧은 삶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기회를 가지면서 비자없이 성장하는 미등록이주아동의 삶에 대해서도 눈길을 주었다.
아직도 추측으로 규모를 예상하는 이들 아동들은 2만여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몇 차례 언론에서 크게 다뤄주면서 그림자 아이, 있지만 없는 아이.. 등으로 한국사회가 이름붙인 아동들의 일상생활도 언론을 통해, 책을 통해 조금씩 드러났다.
비자가 없으니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신분번호가 없고, 신분번호가 요구되는 수많은 일들에서 배제되어야 했다. 건강보험이 안되어 아파도 너무 비싼 의료비를 생각해 참아야 했고, 인종차별을 당하고 혐오발언을 듣고 왕따를 당하고 학내폭력을 당해도 대응하지 못했다. 많은 아동들이 그늘에서 조용히 지내야 했고, 비밀을 가지면서 또래관계에 지장을 받았다. 불과 이십여년 전만 해도 한국의 공교육은 버젓이 아동들을 거부하였고, 받아들인 아동에게도 교육에 필요한 신분번호가 없다며 학교홈페이지 가입불가, 수학여행시 보험가입불가, 좋아하는 아이돌가수 콘서트도 못가고, 번듯한 기술자격증도 못 따고 대학진학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비자없음이 밝혀지면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학생도 추방당했다.
차갑고 앙상하고 뾰족한 이런 현실은 아동들을 절망시켰고, 당연하게 학습의 의욕과 생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했다. 아동들은 학교를 떠났고, 당장 몇 푼이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은 이들을 생활전선으로 내몰았다. 이번엔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어 조용히 그늘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N국가 청년처럼 단속되어 아무 연고도 없는 모국으로 내쫓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순순히 부모의 나라로 내쫓길 수 없었던 이 청년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그리고 법원은 한국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이주민 청소년의 추방에 제동을 걸었다.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게 되어 이제는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전문인력이 되어 주변의 칭찬이 자자한 이 청년은 운이 좋았다. 내쫓긴 청소년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노동인력이 부족한 한국은 이들을 내쫓았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주아동에게 있어서 체류의 안정은, 아동의 생명권, 교육권, 보육권, 건강권 등 유엔아동권리협약(1991년 11월20일 대한민국 비준)이 천명하고 있는 아동의 기본권보호를 위해서는 기본으로 주어지는 조건이다. 결코 특혜적 조치가 아니다. 체류 안정화를 취하지 않았을 때, 국제사회에서 반인권적 외국인정책으로 비판받게 되는 조치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비준한 국제협약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수많은 아동들을 오랫동안 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해놓았었다.
2021년과 2022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받은 법무부가 한국에서 6년(한국 출생 혹은 영유아기 한국입국 아동)이상 혹은 7년(영유아기가 지나 입국한 아동 등)이상 체류한 미등록이주아동에게 정규비자를 부여한다는 구제대책을 세웠을 때, 수많은 미등록이주아동들이 환호했고, 그 동안 팽개쳐 두었던 자신의 꿈을 다시 주섬주섬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또래들과의 관계에서 숨겨야 하는 비밀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핸드폰도 가질 수 있었고, 학교의 교외수업, 수학여행도 당당히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따지 못했던 기술자격증도 따고, 대학진학도 고민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의 혜택을 받은 아동들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렸다.
어렵사리 구제대책의 혜택으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동들은 정책초기, 대학을 진학하는 것 외에는 이 땅에 체류할 방법이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취직해서 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년들도 대학에 진학하여 한국으로 유학 온 유학생의 지위를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정기적 비자연장, 체재비확인을 위한 1천만원의 은행잔고(입학시에는 2천만원의 은행잔고를 증명해야 한다), 승인받아야 하는 아르바이트, 휴학도 맘대로 선택할 수 없는, 졸업 후에도 제한되는 취업,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예비되는 출국 등이 기다리는 또 다른 애닳는 고난의 길로 들어갔다.
본인 이름의 외국인등록증을 교부받고 뛸 듯이 기뻐하며 '이런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다'던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체재비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미친 듯이' 법무부가 허용해준 취업시간 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성장하고, 돌아갈 모국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의문이 들 정도인 이들 청년들에게 체재비증명을 요구하면 어쩌자는 것인지. 청년들에게 조금은 여유를 갖고 자신의 장기를 살리고 사회에 도움을 주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비자를 주는 것은 이들을 위한 정책일까? 우리 사회를 위한 정책일까?
비자 부여 조건을 채우지 못한 아동(체류기간이 미달되거나 부모가 대체로 1인당 900만원에 달하는, 일시납부해야 하는 미등록체류기간 동안의 과태료를 납부하지 않은 경우), 학교밖 아동, 이미 청년이 된 아동들은 이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스스로 출국하였다가 다시는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거나, 고 강태완씨처럼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재입국하거나, 추방당하거나, 성인 미등록이주민이 되어 이 땅에서 여전히 그늘속의 위축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처럼 제한 많고 한국의 상황을 보면 모순되는 정책인 미등록이주아동 합법화조치를 시행한지 4년, 이쯤이면 그간의 정책시행경험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아동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이 조치는 2025년 3월 31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아동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주아동들은 기본권의 사각지대로 다시 밀려들어가 버린다. 미래를 꿈꿔볼 기회는 원천배제된다. 그게 싫으면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방침은 또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 걸까? 인구절벽에 맞닥뜨린 이 나라에서.
대한민국의 미래에서 이주민과의 공존은 이제 존속의 조건이다. 나날이 다원화되어가는 대한민국, 평화로울 뿐 아니라 상생하는 대한민국을 준비한다면, 인구절벽을 직면한 이 나라가 내디딜 그 첫걸음은 미등록이주아동의 합법화이다. 이는, 이주아동들이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성장하여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 하는 기본조건이고, 그들의 건강한 삶과 노동에 우리가 기대어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선순환 조치의 첫걸음이다. 그 첫 걸음을 좌고우면해서는 안된다.
글쓴이인 석원정 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은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이주배경아동청소년기본권향상을위한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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