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나는 솔로〉 시청은 음주나 흡연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해로운 줄 알면서도 습관처럼 즐기는 중독성 강한 기호품이랄까. 보기 싫은데 자꾸 찾게 되는 길티 플레저 예능, 누군가의 표현처럼 ‘길티테인먼트’의 끝을 보여주는 〈나는 솔로〉의 도파민은 알코올이나 니코틴 같은 화학물질이 아닌 타인의 불행에서 나온다. ‘예능의 탈을 쓴 사회 실험’이라 불리는 이 극사실주의 데이팅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우리의 의식 밑바닥에는 ‘샤덴프로이데’라는 사악한 밑불이 소리 없이 지글거린다. 손해(schaden)와 기쁨(freude)을 뜻하는 두 단어를 조합한 독일어,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실수나 부족한 점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를 뜻한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솔로 남녀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일주일가량 합숙하며 밤마다 소맥을 퍼 마시는 한국형 연애 워크숍 〈나는 솔로〉는 애초 시작부터 시청자의 샤덴프로이데에 불을 지피기에 맞춤한 환경을 제공한다. ‘자만추’가 아닌 ‘인만추’를 목표로 설계된 ‘이상한 솔로나라’에 경쟁 관계로 묶인 출연진은 술과 장미의 나날 속에서 쉽게 이성을 잃고 날것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중꺽마’ 정신으로 가능성 높은 모든 상대에게 플러팅하는 모쏠남, 질투에 눈이 멀어 달밤의 춤사위를 선보이는 무용 강사, 속 보이는 어장 관리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인플루언서, 마음에 드는 상대와 똑같은 대화를 무한 반복하는 도루마무…. 매 기수 ‘빌런’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는 출연자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그래도 내 처지가 저들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안겨주는 훌륭한 반면교사다. 이들이 겪는 수난은 대부분 그 자신이 초래한 비극이어서, 마음껏 비웃어도 그다지 죄의식이 들지 않는다. 학벌 세탁, 혼인빙자 사기, 학폭 의혹 등 출연진을 둘러싼 각종 논란 역시 샤덴프로이데에 불을 지피는 유용한 땔감이다. 그리하여 비루한 현실에 지친 우리는 매주 수요일 밤 그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삶의 위안을 얻는 것이다. ‘와, 세상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인생 선생님들이 계시구나’ 조롱하고 감탄하면서. 탕후루보다 달콤하고 두바이 초콜릿보다 복잡한 샤덴프로이데의 맛을 살살 녹여 음미하면서.
‘우리’라는 말은 좀 치사하니 이쯤에서 주어를 바꿔보자. 나, 강보라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길티 플레저 중독자다(이게 더 치사한가?). 기후위기를 걱정한다면서 마감 때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배달 음식을 죄책감 없이 주문하고, 생리 기간에는 탕약처럼 시커먼 아메리카노에 설탕 범벅인 추러스나 도넛을 곁들여 먹는다. 고료가 통장에 들어오기 무섭게 해외 직구 쇼핑몰에 들어가 필요하지도 않은 옷과 구두를 구입하고, 인스타그램 광고에 낚여 웹툰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19금 딱지가 붙은 만화 내용이 궁금해 유료 결제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한다. 뭐, 여기까지는 그래도 자학 개그 하듯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잠들기 전 휴대폰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보는 릴스나 쇼츠 영상에 대해 말하려면 조금 더 용기가 필요하다. ‘귀 호강하는 바다포도 먹방 ASMR’, ‘박지윤 최동석 충격적인 녹취록 공개’ ‘해리스 흉내 내는 노빠꾸 트럼프’ ‘현재 논란 중인 트리플 스타 사건 요약’ ‘육즙세연을 본 과즙세연 찐반응’…. 다음 날 아침 휴대폰을 켜고 나의 알고리즘이 띄운 썸네일을 확인할 때면 세탁기 안으로 기어 들어가 나라는 인간 자체를 탈탈 돌리고 싶어진다. 교양인다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황급히 노트북을 열고 오늘자 뉴스를 살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보다 나의 관심을 더 끄는 건 대머리인 관광객의 모자를 벗긴 중국 첸링상 공원의 원숭이다. 민희진과 하이브가 사이좋게 디스를 주고받으며 다 같이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자아가 망치로 깬 호두처럼 조각조각 흩어진다. ‘양측 다 본질에 집중했으면’ 하는 나의 성숙한 바람과 달리 뇌 한쪽에서는 도파민이 물색없이 새어 나온다.
‘빻은’ 사상으로 도배된 음지의 커뮤니티 글을 이따금 훔쳐보는 것도 부끄러운 길티 플레저 중 하나다. 내가 생애 최초로 발을 들인 음지의 커뮤니티는 하이텔도 디시인사이드도 아닌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익명 게시판이었다. 영화 주간지에서 일하던 2000년대 초반, 아직 스마트폰이 상용화되지 않아 기자들끼리 영화판의 가십을 입에서 입으로 공유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입사 후 익명 게시판을 처음 확인했을 때의 충격이란. 만취 상태가 되면 존경하는 감독의 이름을 소변으로 땅에 휘갈긴다는 유명 감독의 지저분한 술버릇부터 딸뻘인 여자 배우와 불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모 영화사 대표의 TMI 사생활까지.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주워들은 비화와 각종 뒷담화를 익명으로 올리던 그 게시판에는 증권가 찌라시에 버금가는 사설 정보가 넘쳐났다.
패션 잡지로 옮기고 난 후에는 X(옛 트위터)나 여초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자극적인 발언을 틈틈이 스캔하는 습관이 생겼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알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실제로 그 덕에 남들보다 빠르게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잡지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나의 음지 커뮤니티 순례는 월례 행사처럼 띄엄띄엄 이어졌다. 며칠 전에는 여초 카페에서 ‘나락’을 키워드로 게시물을 검색하다가 깊은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글을 부러 찾아다니는 속내라는 게 너무 빤하지 않나. 누군가가 헛디디고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안전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해상도 높게 실감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낮에는 소설을 쓰며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애쓰고 밤에는 휴대폰으로 타인의 불행한 사연을 찾아 읽고 있자니 비릿한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길티’가 ‘플레저’를 넘어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샤덴프로이데의 늪에서 빠져나올 때가 되었다는 걸. 영혼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참, 나쏠 정숙이요. 오늘 뉴스 뜬 거 보셨어요?” 네일숍 실장님이 시술을 마친 내 손톱 위에 영양제를 바르며 심상하게 물었다. “아니요? 그게 뭐예요?” 내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얘기인즉슨 23기 정숙이 절도범 의혹에 휩싸여 이후 회차에서 통편집되었다는 말이었다. “안 보신다면서 잘 아시네요?” 내가 놀리듯 묻자 그녀가 넉살 좋게 대꾸했다. “뉴스에서 봤다니까요.”
강보라는 단편소설 ‘티니안에서’로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23년 이효석 문학상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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