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이내훈의 아웃사이더] 33번째 기사입니다. 이내훈씨는 프리랜서 만화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주로 비양당 제3지대 정당에서 정치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민생당 소속으로 최고위원과 수석대변인을 맡고 있습니다. 6월말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특별 시리즈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내훈씨는 2024년 12월16일 마지막 칼럼을 끝으로 당분간 정기 연재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통찰이 담긴 좋은 글을 써주신 이내훈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평범한미디어 이내훈 칼럼니스트] 방향을 아는 사람이 키를 잡는 것은 큰 행운이다. 우리나라가 좀 더 일찍 민주화 되었다면 故 김대중 대통령은 그만큼 더 일찍 키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에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치고 나서야 마침내 74세가 돼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정치적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 정치사 최초로 야당 후보가 전국민의 표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었다. 꽤 많은 이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대표 업적으로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 정상회담 등을 꼽는다. 필자는 문화산업 부흥과 경제성장에도 주목을 해보고 싶은데, 이제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살펴보기 위해 민주화 이후 김대중의 정치 스토리를 차근차근 훑어보려고 한다.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3당 합당을 감행한 김영삼 후보에게 패했고 그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정계를 은퇴한 사람 치고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창립하고 통일 강연에 몰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3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왔고, 1995년 6월 단체장까지 뽑는 최초의 지방선거 지원 유세에 나서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는데 그 덕이었는지 민주당이 좋은 결과를 거뒀다. 김대중 대통령은 곧바로 공식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는데, 민주당 현역 의원 95명 중 65명이 탈당해서 김대중 신당으로 합류했다. 단숨에 제1야당 지위가 된 것인데 기세를 이어가서 19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79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7년 12월 15대 대선에서 드디어 대권을 거머쥐게 된다. 그 당시 DJP 연합을 두고 새정치국민회의 의원들의 반대가 거셌는데 노무현 원내대표의 설득 과정이 주효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시작도 전부터 장애물을 만났는데 바로 외환위기였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무분별한 해외차입으로 경제규모를 늘리는데 치중했고, 불안을 느낀 외국 자본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진 것이다. 우리나라도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긴급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하게 됐고, IMF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새정치국민회의는 노동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는 쪽이었는데 국가 부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폐지, 교원 노조 합법화, 공무원 단결권 보장 등을 관철시켰다. 1999년에는 민주노총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극복 과정은 너무나 혹독했다. 기업들이 줄도산했고, 구조조정 여파로 실직한 가장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한 희생과 시련으로 인해 금융 건전성을 제고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장기적으로 외국자본의 투자가 가능하도록 경제 체질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성장 여건이 마련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유입될 수 있도록 전면 개방했다. 일찌감치 대중문화 산업에 대한 비전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한국 경제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라는 소신이 있었다. 1990년대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는 아시아에서 가장 수준이 높았다. 아시아 전체가 아무로 나미에와 X-JAPAN 등 일본 가수에 열광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때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보다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반일 감정 때문에 공식 수입하기에는 오랫동안 망설여졌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대중문화의 저력을 믿고 결단을 내렸다. 그 덕분에 한국인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데, 만약 그때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계로 뻗어나가는 케이팝도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김대중 대통령은 미래를 읽는 안목이 있는 지도자였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2월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해서 국가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문화산업 지원을 시작했는데 매년 예산을 늘려나갔다. 국가에서 돈을 주지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즉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해서 예술계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초기 문화산업 지원 정책은 출판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상업성이 부족하더라도 가치 있는 서적과 자료 보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는 다른 문화산업의 질적 성장에 원천 소스로 작용하기도 했다. 나아가 김대중 대통령은 영화진흥위원회를 설치해서 영화 자본을 안정화시키려는 노력을 했고, 사전 검열의 법적 근거를 삭제했다. 이로 인해 신진 영화인들의 담대한 도전이 가능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김대중 정부 기간 동안 남북 관계는 역대 정부 통틀어서 가장 좋았다. 2000년 6월15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헌정 사상 최초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 결과 탄생한 6.15 공동선언문에는 남북이 함께 통일을 지향하고, 이산가족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며, 다양한 경제 협력을 하겠다는 양국 정상의 의지가 담겨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 인권 증진과 남북관계 발전의 공로를 인정 받아 2000년 12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관되게 추진했던 햇볕 정책이 어느정도 성과를 냈지만, 북한은 핵 개발과 군사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부에서 출범한 정보통신부를 집중 지원했는데 1998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5조원을 IT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그 결과 1997년 163만명이었던 인터넷 이용자 수가 2001년에는 2438만명으로 급증했다. 1990년대 중후반만 해도 정보화 지수에서 미국, 일본, 독일 등에 밀렸지만 현재는 세계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그 기반이 그때 만들어진 셈이다.
복지 부문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깊다. 외환위기 여파로 사회가 전반적으로 불안했던 만큼 복지 정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9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해서 빈곤층에 대한 복지를 최초로 설계했다.
김대중 정부 기간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벤트가 하나 있다.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필자는 당시 광화문으로 가서 길거리 응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월드컵 유치는 최소 10년 넘게 노력해도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어려운 일인데, 한일 월드컵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값진 성과다. 1996년 유치가 확정된 이후 2002년 무사히 월드컵을 치르기까지 김대중 정부의 안정적인 관리와 유지 역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2월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으며, 2000년 2월에는 비례대표 국회의원 정원의 30%를 여성에 할당하도록 정당법을 개정했다. 나아가 2001년 8월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 등을 고쳐서 출산 휴가를 60일에서 90일로 확대했다. 그리고 2001년 1월 여성부를 출범시켰다.
지금까지 나열한 것들 말고도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과 정치적 성과는 차고 넘친다. 갈수록 대통령다운 대통령이 보이지 않고 있는 시대가 된 것만 같아 서글픈데, 필자는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대통령다웠던 인물을 선택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김대중 대통령을 뽑고 싶다. 대부분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는데 그런 철학으로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유독 최초의 일과 업적들을 많이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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