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탄핵 때와 다른 '비상 상황'…전문가들, 재정·통화·금융정책 대전환 조언
"트럼프 위기에 가장 취약한 경제 구조 의심…대응 중이란 신호 보내야"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한지훈 민선희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일부 해소됐으나, 계엄 사태로 요동쳤던 각종 경제·금융 지표가 단숨에 안정을 되찾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특히 지난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와 비교해도 현 경제 상황이 실물 경기와 금융 흐름 측면에서 현저히 더 취약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어서 시장 충격이 장기화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경제 정책 공백 우려 속에 국내의 극심한 정국 불안은 당장 내년 1월로 예정된 미국 정권 이양과 시기적으로 맞물렸다. 트럼프 신정부의 대외 전략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에 우리 경제가 고스란히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은 치명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대내외 악조건을 고려할 때 해외 투자자를 향한 메시지를 손보는 동시에 재정·통화·금융정책의 대전환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 수면 아래 대기업 유동성 위기·부동산 PF 부실 불거질 수도
한국 경제는 전례 없는 저성장 우려에 휩싸인 채로 비상계엄 사태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애초 내수·수출 동시 부진이라는 이중고가 정국 불안을 만나 삼중고로 가중된 모양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5일 "주식시장이 계속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고, 환율도 미국 대선 후 상방 압력이 커졌다"며 "그런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터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내년 경기를 굉장히 안 좋게 보던 상황"이라며 "특히 연말에 이 사태가 터지다 보니 심한 내수 위축을 가져올 수 있게 됐다"고 진단했다.
앞선 두 차례의 현직 대통령 탄핵안 가결 때와 비교해도 지금의 여건이 눈에 띄게 비관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때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들어온 후 세계 공장으로 부상했을 때"라며 "우리 수출에 큰 타격이 없었다"고 말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당시 상황에 대해 "반도체 '슈퍼 사이클' 초입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시에는 민간 소비 증가율이 큰 폭으로 떨어져도 설비투자가 10~20%대 증가율을 보이면서 전체 경제성장률 하락을 막았다"며 "지금은 기업 설비투자가 부진한데, 민간 소비에도 부정적 변수가 생겼다는 점에서 흐름이 반대"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롯데그룹 등의 유동성 위기 논란이 재차 불거질 수 있고,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이 가속할 위험도 잠재해 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온다.
얼어붙은 경제 심리에 금융기관들이 일제히 자금 집행을 늦추고, 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미노' 파산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허 교수는 "과거와 달리 내각이 줄줄이 내란 공범 혐의를 받는 등 정부가 계엄 사태에 감염된 상태"라며 "전보다 충격의 크기는 훨씬 큰데 대응력은 약한 것"이라고 요약하기도 했다.
◇ "트럼프 정책 대응 시작했다는 신호 시장에 보내야"
계엄 사태로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시각이 일순간 싸늘해졌고, 이는 곧 국내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대혼란으로 이어졌다.
탄핵 정국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시장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대외 메시지 관리에 주력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조영무 연구위원은 "그동안 재정 정책의 여력이 크지 않고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도 느리다는 정책 공백 문제를 지적해왔는데 지금은 그런 차원을 넘어 필요한 시점에 정책 결정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금융 정책의 공백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해외 투자자들이 우리의 정책 대응 자체가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허준영 교수도 "국내 정치와 경제의 프로세스가 분리돼 있다고 외국에 강조해야 한다"며 "대통령 권한대행이 외국에 특사를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경제 안정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는 신호를 글로벌 시장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국 혼란이 경제에 직접 파급을 미치는 통로를 최소화하고, 그런 정책적 노력을 세계에 널리 홍보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정우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이후 그에 따른 후속 조치가 차질 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신정부 출범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국익을 위한 대미 협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보호무역주의와 관세 인상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외교 통상 전열을 재정비하고 물밑 협상을 일관되게 이어가야 한다는 조언이다.
장민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 정부에 대한 교역 정책 대응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당장 미국 측과 협상할 사람이 없으니 모든 면에서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허 교수는 "우리는 트럼프 위기에 가장 취약한 경제 구조라는 의심을 받는다"며 "적어도 미국 신정부 정책에 우리도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경기 하방 관리 '리스크 매니지먼트' 정책 필요"
비상 상황에는 비상조치가 요구된다.
헌정사상 세 번째 대통령 직무 정지, 더욱이 앞선 두 번의 탄핵 정국 때보다 악조건으로 평가되는 현 경제 상황을 무사히 돌파하기 위해서는 대외 메시지 관리뿐 아니라 우리 안의 실질적인 정책 전환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먼저 금융당국의 거시 건전성 관리 강화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까지 부동산 가격 급등세를 가라앉히기 위해 은행 가산금리 조정 등을 통해 대출을 강하게 조여왔지만, 이를 지속할 경우 민생 경제에 미칠 충격이 한층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깔렸다.
조영무 연구위원은 "체감 경기를 중시했으면 한다"면서 "전체 성장률 수치가 아니라 성장률을 구성하는 소비, 투자, 체감경기에는 가계대출과 금리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지금의 가계대출 억제 정책이 바람직한지 등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 구조개혁보다 우선 눈앞의 경기 부양에 무게를 실어야 할 때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박정우 이코노미스트는 한은의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경기 둔화 국면에서 경기 부양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해외 투자자들이 국내 투자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한은이 기준금리 인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할 것으로 보고 경기 부진 장기화를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논리다.
박 이코노미스트는 향후 금리 인하로 인한 환율 변동성 확대 우려에 대해 "경기 회복 가능성이 커지면 원화 약세도 안정될 수 있다"며 "지금은 경기 하방 위험을 관리하는 '리스크 매니지먼트' 정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정부가 고려 중인 선물환포지션 한도 확대와 은행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 규제 완화 등을 신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정정책과 관련해선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안 제출 이전에 국회를 통과한 내년도 '감액 예산안' 범위 내에서도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여력이 충분하고 이를 집행할 의지가 강하다는 점을 시장과 소통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앞서 이창용 한은 총재도 지난 10일 야당 의원들과 만나 윤석열 정부 기조와 다른 "확장적 재정정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에 큰 틀에서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이 밖에 정부가 추진해온 '밸류업 프로그램' 등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도 부각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han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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