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4일) 부친상 당한 민주당 의원… 가슴 아픈 비보에도 ‘탄핵표결’ 참여한다

오늘(14일) 부친상 당한 민주당 의원… 가슴 아픈 비보에도 ‘탄핵표결’ 참여한다

위키트리 2024-12-14 14:57:00 신고

3줄요약

부친상을 당한 가운데도 윤석열 대통령의 2차 탄핵소추안 표결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힌 국회의원이 있다.

오늘(14일) 부친상 당한 민주당 의원… 가슴 아픈 비보에도 ‘탄핵표결’ 참여한다. / 이기헌 의원 페이스북, skyandsun-shutterstock.com

바로 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14일 오전 이기헌 의원실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이 의원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전했다. 의원실은 빈소와 발인 일시, 장지 등에 대해서도 알렸다. 그러면서도 "이 의원은 오늘(14일) 탄핵 표결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공지해 이목을 끌었다.

부친상 비보에도 이 의원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에는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와 관련된 2차 탄핵소추안 표결 중요성 등이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슬픔에도 불구하고 표결에 참여하기로 한 이 의원이다.

윤 대통령 탄핵 재표결은 이날 오후 4시에 국회에서 진행된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 요건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다. 현재 범야권 총 192석이 전원 출석해 찬성표를 행사하더라도 국민의힘에서 8표 이상 이탈표가 나오지 않으면 부결되는 상황이다. 지난 7일 1차 탄핵안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부분 불참하면서 의결 정족수 미달로 표결이 아예 무산됐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지난 13일 오후 6시 30분 울산 롯데백화점 앞 열린 촛불집회에서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탄핵을 외치고 있다. / 뉴스1

한편 이 의원은 이날 부친상 비보를 전한 이후 지난 1월 SNS에 공유했던 ‘나의 아버지 이야기’ 글 여러 편을 페이스북에 다시 올려 주목받고 있다.

다음은 이 의원이 공유한 ‘나의 아버지 이야기’ 글 전문이다. 이 글들은 올해 1월 올라왔다가 이 의원 부친당 당일 14일 다시 공유됐다.

나의 아버지 이야기 1

이종율, 38년 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87세, 지금은 와병 중이셔서 서울 모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누나는 일본 동경에서 본인은 중국 심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린 시절은 본가가 있는 전남 장흥 유치면에서 보냈습니다.

체격이 크고 호방한 기질의 할아버지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업 등으로 한때 상당한 재력을 가지셨다고도 합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한 44년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셨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신의주 교도소에 투옥되셨고 출소하자마자 신의주 현장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외삼촌의 증언에 따르면 모진 옥고를 견디지 못하자 사망 직전 석방되었고 가족들에게 바로 인계되었다고 합니다. 한 줌의 재가되어 도시락 크기에 작은 목기에 담겨 돌아온 할아버지를 7살이던 아버지는 도시락으로 착각하고 배가 고프니 자신이 먹겠다고 삼촌에게 달라고 했다가 혼이 난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상범의 가족은 연좌제의 고초를 받았던 터라 이를 걱정한 집안 어른들은 선산 가장 위 인적이 드문 곳에 매장하고 사망 사유를 이웃들에게도 일체 함구합니다. 그 덕에 장흥댐으로 수몰되어 선산이 모두 이장되었으나 할아버지의 묘만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옥사를 인식하기에 어렸던 아버지가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은 무려 46년이 지난 1990년입니다. 90년 5월 10일 군사정권과 야합한 YS와 JP가 민자당 창당했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87년 6월 민주화 시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정국을 흔들었습니다.

당시 학생회장으로 반대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된 아들의 구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아버지는 뜻밖에 연로한 외삼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너히 집안의 피는 속일 수가 없구나” 아들의 구속으로 충격을 받으신 아버지가 더 놀란 것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서사이셨던 듯합니다. 요즘도 약주 한잔하시면 “내가 배가 너무 고파 우리 아버지 뼛가루를 도시락이라고 생각하고 먹겠다고 덤볐어.” 하며 허허롭게 웃으십니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6.25 분단 전쟁을 겪으면서 가세가 무너져 소년가장으로 형언하기 힘든 가난 속에 성장하셨습니다. 6.25가 한창이던 시절 유치면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경찰과 빨치산이 주인이었던 혼돈의 공간이었습니다. 쌀 한 줌이 1환이었던 그때 그 돈을 벌기 위해 총알도 없는 자기 키만 한 M1 소총을 들고 경찰지서에서 야간 경계를 섰습니다. 빨치산의 공격을 두려워한 경찰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1환의 목숨값으로 관공서를 지키게 한 겁니다. 가족들의 한 끼 식사를 위해 13살 그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었던 그때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나의 아버지 이야기2

가난한 유년 시절은 청소년기로 이어졌고 어떻게든 가족들을 부양하며 공부를 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10대 중반에 서울로 상경해 벽돌공장 벽돌공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니셨지만 그마저도 졸업은 못 하셨습니다. 서대문에 있는 인창고등학교 야간반을 잠시 다니셨던 것이 마지막 학력이십니다.

성인이 되어 다시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를 부양하던 아버지는 1960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에 모든 살림을 정리하고 강원도 인제로 이전해 작은 중국집을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61년 치러진 국회의원선거에 목포를 떠나 인제에서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밀어 당선시켰다는 것이 가끔 들려주시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아버지의 첫 기억입니다. 아시다시피 2일의 임기로 끝나버린 김 대통령의 첫 국회의원 당선입니다.

68년 어머니의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다시 이주하셔서 결혼하셨고 첫아이인 제가 태어났습니다. 75년 아이들은 서울에서 교육시켜야 겠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다시 서울 관악구 봉천동 달동네로 아이 셋을 데리고 이주합니다. 그 당시 봉천동 102번지 달동네는 상하수도 시설도 없습니다. 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물지게를 지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해 서울은 급격한 산업화로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농촌 인력이 대거 상경한 해입니다. 75년 한해 서울 인구가 100만 명이 늘었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산업화와 수도권집중이 시작된 해였습니다.

3남 1녀의 자녀를 키우셨습니다. 본인 일로 파출소 한번 안 가보신 분이지만 자식들의 사고? 로 긴 시간 경찰서, 법원, 교도소를 다니셔야 했습니다. 저도 2년의 수감생활 했지만 둘째도 대학에 진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긴 수배 기간과 구속을 겪었습니다. 진보정당 운동을 하는 동생은 지금도 노동조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체대에 진학한 막내동생은 지금 스노보드 국가대표팀 이상헌 감독입니다. 집안 내력으로 보면 특이한 직업이지만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설상 종목 첫 은메달리스트 이상호 선수를 키운 미담 기사를 많이 내준 아버지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나의 아버지 이야기3

민주시민 교육

선거가 있던 날 아버지는 새벽에 아이들을 깨워 목욕을 시키셨습니다. 평소에 입지 않는 정장을 입으시고 6시 전에 줄을 서셨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부모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누굴 찍는지 왜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지 일체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주권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참정권의 기본을 가르쳐 주신 듯합니다.

목에 칼

약주를 잘 못 하셨지만, 사업상 술을 드시고 들어온 날은 아이들을 다 불러 앉히고 “남자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공부만 잘해준다면 끝까지 지원하겠다.” 취기에 항상 던지셨던 훈계였지만 되짚어보면 유년기부터 시작된 가난 속에 본인이 다하지 못한 번듯하고 당당한 인생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걱정이 진짜 병

항상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아직 큰 병치레는 없었고 본인의 건강 관리에 철저한 분이시지만 항상 자식들 문제로 걱정을 달고 사셨습니다. 그 덕에 뭘 결정할 때 아버지와 상의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이 수배 중이던 10여 년 전 긴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결국 병원에 입원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등장 이후 노동운동을 하는 둘째와 없어져 버린 민정수석실의 마지막 민정비서관이 된 큰아들의 안위를 걱정하셨습니다. 다시 잠을 못 이루시다 현재 병원에 입원중입니다. 문병도 쉽지 않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짧게 서술했지만 참 어려운 삶이 셨습니다. 아버지 없는 유년 시절의 고통과 가난, 욕심만큼 배움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소외, 인생을 다 걸고 자식 넷을 키우셨지만 본인의 뜻대로 안정적인 직업이나 경제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아쉬움. 국가의 평화와 국민들이 큰 걱정 없는 사는 세상만들겠다는 자식들의 삶이 아버지를 고통 속에 사시게 한 것 같아 죄스럽습니다. 퇴원하시면 잠도 푹 주무시고 자식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퇴원하시면 아버지와 사진을 하나 찍어야 겠습니다. 같이 찍은 사진을 찾으니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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