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겨울,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퇴진 촛불이 광장을 밝히고 있다. 8년 전 '국정농단' 주범 박근혜 퇴진 촛불에 이은 두 번째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촛불'이다. 탄핵 대상이 박근혜에서 윤석열로 바뀌었을 뿐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표출된 광장의 분노는 8년 전 '국정농단 촛불'을 방불케 한다.
박근혜 탄핵 촛불은 130여 일간 광장을 밝혔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가을, 겨울, 그리고 봄까지 세 계절을 맞이했다. 2017년 3월 10일 11시 21분 '박근혜 탄핵'이 인용되자, 비로소 봄이 왔다. '박근혜가 탄핵돼야 봄이 온다'던 말은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있다. 한밤중 국민을 '비상계엄 공포'로 내몬 윤석열에 대한 심판이다. 윤석열 탄핵도, 박근혜 탄핵 때와 마찬가지로 인고의 시간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광장의 봄을 불러왔던 총 20차례의 박근혜 퇴진 촛불 집회를 되짚어봤다.
'청계'에서 '광화문'으로…도심, '해방구' 되다
박근혜 퇴진 촛불은 윤석열 퇴진 촛불보다 한 계절 먼저 시작됐다. 2016년 9월 말 10월 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작인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모금 의혹'과 함께 박 전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 씨(최서원으로 개명) 딸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 의혹' 사건이 재점화되면서 최 씨의 존재가 전면에 부각됐다.
박 전 대통령은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헌법 개정 완수'를 언급하며 개헌 논의로 출구를 마련하려고 했으나, 그날 밤 JTBC가 최 씨의 태블릿 PC를 입수, '최 씨가 대통령 연설 전 연설문을 미리 읽어보고 수정했다'고 보도했다. 민심이 요동쳤다. 박 대통령은 다음 날 연설문 유출 의혹을 시인하며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민심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10월 29일 오후 6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주최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_박근혜' 첫 집회가 청계 광장에서 열렸다. 주최 측 추산 2만 명의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 '이게 나라냐'라는 손피켓을 들고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쳤다.
시민들은 집회가 끝난 뒤 광화문 광장으로 행진했다. 경찰은 '캡사이신을 사용하겠다'고 경고했고, 시민들은 "폭력경찰 물러나라", "평화시위 보장하라"며 대치했지만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11월 5일 2차 집회가 20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 국민행동'이 주최로 열렸다. 주최 측 추산 20만 명이 참여했다. 일명 '교복부대'로 불린 10대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박근혜 지지자'로 알려진 60·70대 노령층도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시청·숭례문·을지로·종로 등 사실상 '해방구'가 된 도심을 자유롭게 거닐며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2만이 20만으로, 일주일 새 10배가 넘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온 데는 전날 박 전 대통령의 2차 담화 여파도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며 울먹였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는 '내가 이러려고 세금 냈나', '내가 이러려고 직장 다녔나', '내가 이러려고 투표했나' 등 다양한 패러디를 양산했다.
100만 촛불, 집회 역사를 새로 쓰다
11월 12일 3차 집회는 100만 촛불로 광장이 가득 찼다. 광장에 100만 명이 모인 것은 1987년 6.10 항쟁 이후 처음이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고로 숨진 '효순이·미선이 추모 집회'에서 시작된 촛불 집회 기록도 경신했다.
이날은 경찰 물대포로 사망한 '백남기 농민 1주기'였다. 이에 농민들은 '청와대' 영정이 걸린 상여를 메고 행진했다. 이런 가운데 경찰이 청와대 인근에 물대포를 대기시켜 놓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도 커졌다. 백남기 농민 사망 진상규명과 함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반대, 일본군 '위안부' 한일합의 철회 등 온갖 이슈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블랙리스트'에 오른 방송인 김제동·김미화, 가수 전인권·이승환 씨 등 대중 예술인들도 함께했다. (☞ 관련 기사 : 2016년 11월 12일 자 '이승환, 촛불집회 무대 올라 "하야하라 박근혜"')
촛불은 광화문 앞부터 시청 광장까지 이어졌으며, 광화문 광장을 기준으로 서소문로와 을지로 방향 등 행진 경로만 5곳에 달했다. 청와대 200미터(m) 앞 청운·효자동주민센터와 경복궁역 사거리 등에서는 시민과 경찰 간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은 집회가 끝난 후에도 자발적인 '무박 2일' 집회를 이어갔다.
11월 19일 4차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50만 명이 참여했다. 시민들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홍대입구, 삼각지, 마로니에 공원 등 동서남북 4곳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모였다. 광장 한켠에서는 '박근혜 탄핵'을 비롯한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제정 촉구', '탈핵을 위한 잘가라 핵발전소' 등 다양한 서명 운동이 전개됐다.
시민들은 경찰 앞에서 "비폭력"을 외치며 평화 집회 분위기를 이어갔으며, 한 미술가의 제안으로 차벽은 다양한 꽃 스티커가 붙은 '꽃벽'으로 바뀌었다.
11월 26일 5차 집회는 서울에서만 150만 명이 모여 청와대를 포위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서울행정법원의 청와대 200미터(m) 앞 행진 허용으로, 주최 측이 준비한 '청와대 인간 띠 잇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시민들은 청와대의 동쪽(삼청동~동십자각)과 서쪽(청운동주민센터~경복궁역), 그리고 남쪽(광화문)을 에워싼 채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또 오후 8시 정각 집회 참가 시민들은 촛불을 끄고 각 가정과 사무실, 공장 등에서는 불을 끄는 '저항의 1분 소등'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시민들은 소등 후 1분이 지나자 일제히 다시 촛불을 밝히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외쳤다. 서울에 첫눈이 내리는 등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 150만 명, 지방 40만 명 등 전국적으로 190만 명이 한목소리로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관련 기사 : 11월 26일 자 '국민 4%가 광장에…건국 이래 최대 인파')
이 즈음 국회는 초긴장 상태였다.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려면, 가결정족수인 200표 이상이 나와야 했다. 야당의 172석만으로는 부족했다(더불어민주당 121명, 국민의당 38명, 정의당 6명, 무소속 7명). 여당인 새누리당(128명)의 이탈표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11월 20일 박 전 대통령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동정범'이자 '피의자'로 적시하면서 정치권이 요동쳤다. 비상시국위원회를 만들어 탄핵 정국 해법을 모색하던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이 탄핵 찬성으로 의견을 모아갔다. 야3당은 '박근혜 탄핵소추안'을 12월 2일 국회 본회의에 보고할 계획이었지만,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의 제안으로 9일로 의견을 조율했다.
200만 촛불, '박근혜 탄핵'을 이끌다
촛불이 청와대를 에워싸며 압박 수위를 높이자, 11월 26일 박 전 대통령은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저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며 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백약이 무효한 상태였다.
촛불은 횃불이 됐다. 12월 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대 규모인 230만 명이 광장에 모였다. 전국 단위로 집계된 참가 인원은 서울 170만, 지방 60만 명이었다. 이날 6차 집회에는 '박근혜 선전포고-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횃불이 된 촛불은 박근혜·최순실 외에도 탄핵안 반대 입장을 표명한 새누리당 의원들과 미르·K재단에 돈을 헌납한 재계 총수들까지, 규탄 대상을 넓혀갔다. 시민들은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 계란을 던지고, "박근혜-재벌 공범이다. 구속 수사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재계를 동시에 압박했다.
낮 시간에 한해 청와대 앞 100m 지점(효자치안센터)까지 집회와 행진이 허용되면서 시민들은 청와대 턱 밑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본 집회 후 행진 대오가 자하문로와 삼청동 쪽으로 이동하면서 경찰 차벽에는 '세월호 7시간 단 한 명도 안 구한 박근혜 구속수사!'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었다. 이날은 시민들이 권력의 중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날로 기록됐다.
국회의 박근혜 탄핵소추안 표결 당일인 12월 9일, 여야 의원 299명 중 찬성 234표로 탄핵안이 가결됐다. 야당 172표에 62표가 더해졌다. 예상을 뛰어넘는 이탈표가 나온 것이다.
12월 10일 7차 집회에서 주최 측 추산 서울 80만 명, 지방 24만 명 등 100만 명 이상이 다시 촛불을 들었다. "국민이 승리했다"며 탄핵안 가결을 기뻐하는 시민도 있었지만, "물러날 때까지 촛불"이라는 다짐도 표출됐다. 박근혜 탄핵안을 넘겨받은 헌법재판소 앞에는 '헌법질서 파괴, 범죄자 박근혜'라는 푯말을 든 1인 시위가 등장했다.
촛불의 기세는 계속 이어졌다. 시민들은 12월 17일과 24일에도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각각 70만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집회 참가 누적 연인원은 900만 명에 달했다.
2016년 마지막 날, 시민들은 광장에서 '송박영신(送朴迎新, 박근혜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다)'를 함께했다. 주최 측은 12월 31일 오후 9시 기준 서울 90만 명, 지방 10만 명 이상이 모여 집회 참가 누적 인원이 10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박근혜 탄핵이라는 단일 의제로 1000만이 집결한 최초의 사례였다. (☞ 관련 기사 : 2017년 1월 1일 자 '"떠나라 박근혜!…새해 소망은 세월호 진상규명"')
새해에 다시 시작된 촛불…"박근혜 조기 탄핵" 구호로 헌재 압박
2016년에서 2017년으로 해가 바뀌고, 사건 번호 '2016헌나1'의 탄핵 심리가 본격 시작됐다. 바야흐로 '헌재의 시간'이었다.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영하의 날씨에서도 매주 촛불을 들었다.
1월 7일 11차 집회에는 60만 인파가 모였다. 이날 집회는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앞두고 '박근혜는 내려가고 세월호는 올라오라'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촛불 구호는 "박근혜 조기 탄핵"으로 바뀌었다. 주최 측도 "1월 조기 탄핵을 목표로 청와대와 헌재를 압박할 것"이라고 했다.
시민단체들은 12차 집회가 예정된 1월 셋째 주를 '재벌총수 구속 집중행동 기간'으로 선포하고 특검 사무실(대치동)과 삼성 본관(강남역) 앞 등에서 집회를 열었다. 열기는 그대로 12차 집회(1월 14일)로 이어졌다.
여기에 30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박종철 열사에 대한 추모가 더해지면서 "공안 정치 청산하자"라는 구호도 나왔다. 행진은 청와대와 총리공관 외에 재벌 총수 구속을 촉구하기 위해 에스케이(SK)와 롯데 건물이 있는 종로까지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관련 기사 : 2017년 1월 14일 자 '"박종철 열사, 정원 스님의 뜻 잊지 않겠습니다"')
함박눈이 쏟아진 1월 21일, 광장에는 32만 명이 운집했다. 김기춘·조윤선 등 박근혜 정부 인사들은 구속됐지만 삼성 이재용이 구속을 면하면서 재벌 중심의 사회 구조에 대한 회의가 쏟아졌다. "재벌 공화국 해체해야 진정한 촛불의 승리"라는 말도 나왔다.
이날 광화문 집회에 앞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시민 1200여 명이 도널드 트럼프 취임에 반대하는 '세계여성공동행진'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는 "박근혜의 실패는 여성 정치의 실패가 아니라 유신 정권의 실패"라며 "아직 여성(들의) 사회는 오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관련 기사 : 2017년 1월 21일 자 '[현장] 눈 펑펑 와도... 촛불집회 32만명 운집')
설 연휴를 쉰 촛불은 2월 4일 다시 광장을 밝혔다. 이날은 박근혜 퇴진 촛불 집회가 시작된 지 99일이 된 날이었다. 무대에서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거부로 불발된 청와대 압수수색에 대한 분노가 이어졌다. 또 특검에 출석하며 "억울하다"고 항변한 최순실 씨에게 "염병하네"를 일갈한 청소 노동자가 무대에 올라 큰 박수를 받았다.
다시 100만 촛불…3.1절 광장 메운 만세 삼창
권한대행 황교안의 특검 훼방이 노골적으로 이뤄지면서 '박근혜 일당'도 고개를 들었다. 보수단체는 '탄핵 반대' 몸집을 키우며 '계엄령'이란 단어까지 끄집어냈다. 충돌 우려에도 촛불은 광장을 지켰다. 2월 11일 15차와 18일 16차 집회에는 각각 8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특검을 연장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광장에는 다시 100만 촛불이 모였다. 신년 들어 가장 큰 규모였다. 2월 25일 열린 17차 집회는 '박근혜 4년, 이제는 끝내자'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이날은 박 전 대통령의 취임 4주년이기도 했다. 집회에서는 '헌재 탄핵 인용', '특검 수사 연장' 등 구호가 울려퍼졌다.
삼일절에 열린 18차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3.1 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만세 삼창을 했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무대에 올라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넘겨줘야 한다"며 박근혜 탄핵에 힘을 보탰다.(☞ 관련 기사 : 2017년 3월 1일 자 '3.1절 광장서 '탄핵' 외친 日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헌재의 '박근혜 탄핵안' 결정이 예고된 가운데 열린 3월 4일 19차 집회는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주최 측 추산 90만 명이 참여했으며, 지난해 10월 29일부터 이날까지 누적 연인원 1500만 명을 돌파했다.
헌재 "박근혜 파면" 선언에 시민들 "촛불의 승리" 감격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재는 재판관 만장일치 의견으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했다. 퇴진행동은 박근혜 탄핵은 "주권자들의 승리", "시민들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이튿날 열린 20차 집회는 말 그대로 축제였다. 65만 명의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 대신 '이게 나라다 이게 정의다'라고 쓰인 손 피켓을 들었다. 촛불 파도타기가 이어졌고,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시민들은 박근혜 탄핵과 함께 성큼 다가온 봄을 만끽했다.
퇴진행동은 이날 "박근혜 탄핵은 또다른 시작"이라며 정치·경제·문화 등 10개 분야에 대한 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담은 '2017 촛불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재벌체제 개혁, △정치·선거제도 개혁, △좋은 일자리와 노동기본권, △사회복지·공공성 및 생존권, △남북관계와 외교안보 정책개혁, △공안통치기구 개혁, △위험사회 구조개혁, △교육 불평등 개혁·교육 공공성 강화, △성 평등과 사회적 소수자 권리, △언론개혁과 자유권 등이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3월 10일까지 133일간 이어진 박근혜 퇴진 촛불은 이날 공식적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세월호 인양(3월 25일) 및 세월호 참사 3주기(4월 15일), 조기 대선 전 마지막 집회(4월 29일) 등 촛불 집회는 세 차례 더 이어졌다.
박근혜 퇴진 '1000만 촛불'은 그해 10월 독일 공익·정치 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으로부터 '2017 에버트 인권상'을 받았다.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며, 한국 국민의 촛불집회는 이 중요한 사실을 전 세계 시민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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