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어둡고 칙칙하다. 양옆 밝은 색채도 가운데 검은색에 짓눌린 듯하다. 제목을 보고 나서야 창문을 그린 작품임을 알게 된다. '콜리우르의 프랑스 창'(1914)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앙리 마티스(1869∼1954) 작품임을 확인하면서 놀란다. 또 이 그림을 그리기 약 10년 전, 같은 장면을 마티스 특유의 색채로 화사하게 그린 작품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다시 놀란다. 1905년 그린 '열린 창, 콜리우르'다.
화사한 벽면 사이 큰 창이 열려 있다. 창 바로 앞에는 다양한 꽃을 피운 화분이 여러 개 놓여 있고, 뒤로 펼쳐진 바다엔 작은 배들이 떠 있다. 근경, 중경, 원경 구도가 조화롭고 색과 사물들은 풍요롭다.
작은 마을인 콜리우르는 마티스가 파리를 떠나 10년 가까이 지낸 지중해 연안 휴양지였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그린 두 작품은 기본 구도 이외 모든 게 바뀌었다. 제목도 달라졌다. 마티스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대조되는 그림을 그렸을까?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동생은 전쟁 포로가 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마티스는 입대하려 했으나 여러 차례 거부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마티스에게 콜리우르는 휴가지가 아니라 유배지였다. 같은 곳에서 마티스는 마냥 바다와 햇살을 즐길 수 없었다. 마음과 창문을 닫았다.
배들의 다채로운 색상, 감미로운 바다 분위기, 다사로운 햇살이 10년 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단지 창문을 닫았을 뿐이다. 변한 건 마티스의 '관점'이었다.
'관점'이란 사전적 정의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보고 생각하는 태도 혹은 방향'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perspective'다.
이 단어가 미술에서는 중의적으로 사용된다. 오랫동안 서양 미술 원칙으로 군림한 '원근법'도 'perspective'다. 원근법이란 화가가 정한 위치가 기준이다. 화가 위치와 시선에 따라 그림 내용이 바뀐다. 화가 개인의 시선이 화폭을 지배한다.
작가의 달라진 관점을 그림에 반영한 다른 사례는 무척 많다. 대표 화가가 현대 미술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폴 세잔(1839∼1906)이다.
'생 빅투아르 산'은 세잔이 정착한 고향 엑스 프로방스 인근 산으로서, 그가 줄기차게 반복해 그린 대상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바라본 산 풍경을 수십 점 그렸는데, 그릴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아래 초기 두 작품(1887)과 후기 두 작품(1904)을 비교하면 마치 다른 곳을 그린 것처럼 표현 방식이 달라졌다.
세잔이 남긴 유명한 명언처럼 "모든 사물 본질은 구(球)와 원기둥, 원뿔이다"라는 점을 실현한 대표적인 예로 자주 언급된다. 기법의 변화는 화풍 변화를 불러오고 점차 관점을 변화시킨다. 넓게 말하면 세계관 변화다.
위에서 말한 'perspective' 어원은 라틴어 'perspicere'다. '꿰뚫어 보다'라는 뜻인데, 이로부터 14세기에 'perspective'가 만들어졌다. 당시엔 '사물을 보는 방식을 변형시키는 광학유리'를 뜻했다고 한다. 관점이란 우리가 보는 또 하나의 '렌즈'임을 유추할 수 있다.
예술을 떠나 일상에서도 다르게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보는 노력만으론 부족하다. 듣고, 냄새 맡고, 생각하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내 눈과 귀와 코, 그리고 머리에 어떤 '렌즈'를 끼울 것인지, 그 렌즈가 잘 닦여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긍정적인 관점 변화는 마티스와 세잔에서처럼 창의적인 작품을 탄생시킨다. 부정적인 관점은 편견과 선입관이다. 많은 경우 이 둘은 세상을 왜곡하는 장해물로 작용한다.
그 원인은 대상에 있지 않다. 나 자신에게 있다. 내가 그림을 마주해 보듯, 세상을 보는 이도 나다. 창조와 변혁, 퇴보와 유실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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