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정부 불신임안 표결 전망…가결 가능성 커
내각 해산 시 62년만…정치적 후폭풍 엄청날 듯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프랑스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2일(현지시간) 내년도 예산안 중 일부를 처리하기 위해 '의회 패싱'이라는 극단적 경로를 선택하면서 프랑스 정국이 혼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야당은 즉각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하며 정부를 끌어내리겠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붕괴할 경우 내년도 예산안은 최종적으로 부결될 전망이라 일각에선 미국의 '셧다운'(정부의 일시적 업무정지) 같은 상황까지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 정부 운명 건 바르니에…RN 등 불신임안 발의
바르니에 총리는 이날 정부의 책임하에 하원 표결 없이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헌법 제49조3항을 발동해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사회보장 재정안은 내년도 예산안 가운데 일부분으로,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가족 지원 등 각종 사회 보장 시스템의 재정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예산안이다.
야당인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과 극우 국민연합(RN)은 사회 복지 축소와 프랑스인들의 구매력 감소 등을 우려하며 일부 법안에 반대해왔다.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자 바르니에 총리는 '의회 패싱'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바르니에 총리는 "국민을 위해 책임감 있고 필수적이며 유용한 재정안을 채택할지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며 정당들에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미래"를 우선시하는 책임을 보이라고 촉구했다.
NFP와 RN은 즉각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RN의 마린 르펜 하원 원내대표는 "바르니에 총리는 1천100만 유권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며 "이에 우리도 대응할 것"이라며 불신임안을 발의하고 이에 찬성하겠다고 밝혔다.
NFP 역시 정부의 헌법 제49조3항 발동을 비난하며 "이 불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바르니에 이후엔 마크롱 차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 헌법상 불신임안은 하원 재적 의원의 과반수 찬성이 있으면 가결된다. 전체 의원 577명 가운데 현재 2석이 공석이라 가결 정족수는 288명이다.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정부는 즉각 총사퇴해야 한다.
불신임안에 대한 표결은 이르면 4일 오후, 늦어도 5일엔 진행될 전망이다.
◇ 최악 상황은 '셧다운'…우회로 있으나 '첩첩산중'
정부가 붕괴하면 바르니에 정부가 추진하던 모든 예산안도 폐기될 것이라고 프랑스 법학자들은 설명한다.
릴 대학의 공법 교수인 오렐리앙 보두는 일간 르몽드에 "바르니에 정부가 붕괴하면 정부는 더 이상 새로운 법안을 추진할 권한이 없으며 단지 '일상적인 업무 처리'만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31일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공무원 급여 지급이나 국가 공급업체에 결제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고 공공 서비스 운영 역시 중단된다. 즉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 행정이 마비되는 '셧다운'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있다.
우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해 새 정부의 권한 하에 예산안을 제출하는 방안이다.
문제는 총리 후임을 지명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 6월 말∼7월 초 조기 총선 결과 NFP가 의회 1위 세력에 올랐으나 마크롱 대통령은 좌파 인사 대신 자신의 집권 여당과 우파 공화당의 지지를 받는 바르니에 총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연립 정부 세력 역시 의회 내 과반수를 얻지 못해 정책 추진력은 미약했다. 바르니에 총리가 이날 헌법 조항을 이용해 예산안을 밀어붙인 것도 일반 절차대로 의회 표결을 거쳤다면 부결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진통을 겪은 터라 마크롱 대통령은 후임 총리를 임명하는 데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
우여곡절 끝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 예산안을 다시 의회에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 심사 과정이 길어져 올해 안에 처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경우 정부는 재정법 관련 조항에 따라 우선 올해 예산을 내년까지 연장하는 특별법안을 제출할 수 있다. 내년도 예산안이 의회에서 처리될 때까지 올해 예산안으로 긴급한 경우만 '땜질'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특별법안마저 의회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까지 다다라 '셧다운' 위기가 현실화하면 마크롱 대통령은 헌법 16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비상 권한을 발동할 수 있다.
이 조항은 국가의 독립이나 영토 보전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경우뿐 아니라 공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 대통령이 특별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규정한다. 대통령은 헌법위원회와 상·하원 의장과 공식 협의를 거친 후 당면 상황에 필요한 조처를 할 수 있다.
어떤 경로를 선택하든 정치적 후폭풍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 정부 붕괴 시 62년만…최단 집권 기록 전망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1958년 들어선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 지금까지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이 발의된 경우는 130건이 넘는다.
그러나 하원 표결을 통과해 내각이 해산된 건 1962년 10월 샤를 드골 대통령 당시 조르주 퐁피두 정부가 유일하다.
당시 드골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위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의회 절차를 제치고 국민투표로 결정하려 했고, 이에 의회가 강하게 반발해 정부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당시 퐁피두 정부는 총사퇴했으며, 드골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 결과 범여권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자 드골 대통령은 퐁피두 총리를 재임명했다.
바르니에 정부가 붕괴한다면 그로부터 62년 만이다.
바르니에 정부가 들어선 건 지난 9월로, 내각이 해산할 경우 5공화국 사상 최단 집권한 정부로 기록될 전망이다.
임기를 2년여 남긴 마크롱 대통령도 정치적 치명상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san@yna.co.kr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