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엄숙주의에 대한 위험한 착각

성 엄숙주의에 대한 위험한 착각

코스모폴리탄 2024-12-03 00:00:02 신고

서른이 넘어 〈코스모폴리탄〉에 글을 쓰는 필자가 된 김에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혼자 미용실을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미용실에 가면 〈코스모폴리탄〉부터 찾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코스모폴리탄〉에는 늘 섹스에 관한 글이 있었고, 나는 미용실 직원분이 내가 그 페이지를 유심히 보는 것을 눈치채면 부끄러워하면서도 틈틈이 보고 싶은 페이지마다 손가락을 끼워놓고 그 페이지를 덮었다 펼쳤다 하며 열심히 섹스에 관한 글을 정독했다. 스무 살이 한참 넘어서도 내가 섹스에 관한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여성은 섹스를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성기 삽입이 아닌 방법으로 어떻게 성적인 쾌락을 누릴 수 있는지, 여성의 자위는 남성의 자위와 무엇이 다른지, 여성은 남성이 아닌 사람과 어떻게 섹스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한국어로 배울 방법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한국 여성이 섹스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혼전 순결’을 먼저 배우고, 섹스를 경험하기 전에 성추행을 먼저 당한다. 과거에 이러한 사실은 여성의 아주 사적인 문제로만 여겨졌고, 공론화되기 어려웠지만, 페미니즘을 경험한 여성들은 이제 “가장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모여, 이제 여성들은 섹스를 둘러싼 세계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강간이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여성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화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됐다. 2018년, 한국에서 사회적인 위력을 가진 남성들에 의해 행해진 성폭력이 연이어 보도되고 여성들이 소셜 미디어와 거리에서 ‘미투(MeToo)’와 ‘위드유(WithYou)’를 외치며 피해자와 연대한 후, 한국 사회는 분명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성차별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그 후 가해자에 대한 사법기관의 관대한 처벌 기준, 가해자들의 반성 없는 사회 복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고립, 이에 따른 트라우마와 희소한 지원책,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를 적극적인 정치 전략으로 이용하는 정당정치, 반복되는 스토킹과 교제 살인, 디지털 성범죄 등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한국 사회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쟁취하는 일에 지독한 무력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 시작된 ‘4B(비·非)’로 불리는 ‘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 운동은 여성에게 연애와 섹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강력한 저항처럼 등장했지만,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를 남성과의 관계로부터 적극적으로 분리하여 방어함으로써 어떠한 폭력에도 노출되지 않겠다는 선언과 좀 더 가까워지고 있다. 섹스를 남성 중심의 세계로부터 탈환해 올 수 없다면, 섹스의 세계에 아예 가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섹스에 관해 방어적인 성적 자기 결정권의 실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4B’의 ‘B(비·非)’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반대한다’라는 의미에 더 가까워져 있다. 지금의 ‘4B 운동’을 지지하는 많은 여성이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고 바꿔나가는 것보다, 온라인상에서 ‘4B’를 잣대로 다른 여성들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여성의 성적 자유를 억압했던 과거의 성 엄숙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많은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고, 성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4B 운동을 시작했지만, 4B 운동이 점점 더 그 급진성을 잃어가는 이유는 기존의 성차별적인 인식을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데 있다. 먼저 섹스가 여성에게 무조건 폭력적이라는 인식은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신체와 다르게 섹스로 훼손될 수 있고, 한 번 훼손되면 회복 불가능한 존재로 보는 ‘순결주의’와 다르지 않다. 섹스하는 순간 여성은 일방적인 피해자가 될 뿐이라는 두려움은 우리 사회에서 더 첨예하게 다뤄지고 공적으로 교육돼야 할, 섹스 과정에서의 동의와 합의에 대한 담론이 전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나아가 모든 여성의 섹슈얼한 표현을 성폭력의 빌미로 여기고 금기시할 뿐만 아니라 해당 여성을 강하게 비난하는 것은 성범죄 피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것과 맞닿아 있으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피해자다움을 더욱 공고히 하는 구조와 연결돼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성이 계속해서 성적으로 취약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를 남성으로부터 무조건 방어하고 성적 쾌락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적 쾌락을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더 많은 성적 동의와 합의를 위한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우리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섹스를 폭력의 영역으로만 가둬둘 때 여성들에게 섹스는 더욱 미지의 영역이 되고, 여성은 자신의 몸과 성적 쾌락에 대해 알 권리를 잃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성들이 섹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섹스에 대해 여성의 알권리를 더욱 주장해야 한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섹스에 대해 여성이 알권리를 위해 노력해왔다. 몇 권의 실용적인 책을 추천하자면 한국 저자의 책 중에는 대표적으로 한채윤의 〈여자들의 섹스북〉(이매진)이 있다. 나아가 성적 동의를 둘러싼 담론과 성적 동의를 어떻게 일상에서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 밀레나 포포바의 책 〈성적 동의: 지금 강조해야 할 것〉(마티)도 번역돼 출간됐으며, 페미니스트 섹스 토이 숍의 역사에 대한 책, 린 코멜라의 〈바이브레이터의 나라〉(오월의봄)도 번역서로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섹스를 단순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섹스에 대한 무성애적인 관점으로 다시 사유해 볼 수 있는 앤절라 첸의 저서 〈에이스〉(현암사)도 번역돼 있으며, BDSM을 성적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클라리스 쏜의 책 〈S&M 페미니스트〉(여성문화이론연구소)도 있다. 나아가 일본의 여성 해방 ‘우먼리브’ 운동의 역사를 담은 다나카 미쓰의 책 〈생명의 여자들에게 : 엉망인 여성해방론〉(두번째테제)도 여성의 성적인 욕망의 경험을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안에서 사고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양한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이 글 역시 여성들이 섹스를 위해 알권리를 위한 지도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들을 혼자 읽기보다 친구들과 함께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그 이유는 여성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찾아나가는 여정은 수많은 위험을 헤쳐나가는 과정이지만 이 길에서 친구를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여성이 안전하게 섹스할 권리를 찾는 것을 넘어 함께할 동료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Writer 연혜원 사회학 연구자. 〈퀴어돌로지〉를 기획하고 함께 썼으며, 최근에는 희곡 〈가장자리를 위한 복수 노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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