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김태이 작가] 오늘이 어제인지 아니면 내일인지 분간도 가지 않던 날들이 지나간 자리는 이제서야 추운 계절이었다. 입었던 옷을 저만치 쌓아 두고 개 중에 손에 잡히는 옷만 주섬, 입던 날들을 청산하길 마음먹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라본 그것들 맨 아래에는 여름 가디건이 나풀대고 있었다. 불쌍하다, 너덜거리는 게 포기하지 않기를 겨우 지켜낸 나 같았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하나둘 셋. 그리고 네엣.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벌떡 일어나 조금 휘청였다. 눈을 떴다. 겨울임을 외면하지 말자!
흔한 그 수평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서랍장이 없었다. 플라스틱 리빙 박스를 붙박이 장롱 안에 적층해 두었다. 그래서 어려운 거다. 투덜대며 다섯 개의 박스들을 모두 꺼내었다. 작년에 전시한 그림들도 몇 개 구겨져 나왔다. 아마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내린 최선일 것이었다. 아마 구겨졌으니 그 상품 가치는 끝이려나,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시작이다. 정리되지 않은 가난은 나도 피해갈 수 없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옷들은 다시 내 현 상태(신체)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과 입을 수 없는 옷들로 분류되고, 또 다시 내가 하는 일에 따라 작업할 때 입는 옷과 보여주기식 옷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기타 등등… 운동할 때, 겹쳐 입어야 할 때, 파티에 나가야 할 때, 집에 있을 때, 그리고 또 집에 있을 때… 내 옷을 정리한다는 건 앞으로 내가 어떤 상황에 더 많이 있게 될지 예측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특히 지금처럼 모든 옷을 자유롭게 꺼내지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위치에 어떤 옷을 놓는지 기록할 종이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아마 몇 개월 간은 또 방에 처박혀서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 겨울 파티 옷들은 정돈되지 않은 채로 놔두기로 하자. 제일 먼저 PARTY라는 글자를 박박 지웠다. 새로고침을 생각날 때마다 눌러야 하는 시기, 지원 사업과 전시 공모가 몰아닥치는 지금, 딱히 면접이나 인터뷰도 없을 예정이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나름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PUBLIC 글자는 세모. 예술가 생각 안 하는 시선 끝의 예술가에겐 이게 제일 좋다. 흐린 눈의 웃음.
예측할 수도 있고, 계획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운동복을 제일 손이 잘 닿는 위치에 놔두기로 했다. 그래, 운동복은 하루 입고 세탁실로 들어가니까. 4,000원 남짓한 내 운동복들은 거의 ‘TEMU(테무)’산이다. 그래서 대충 해도 된다. 박스에 넣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들을 적층하고 남은 구석 자리에 운동복 탑이 쌓였다. 그래도 된다. SPORT 글자를 지웠다.
제일 어려운 것은 어떤 기분에 따라 선택할 옷들이다. 그 기준에 따라 외출 여부가 결정되고 꾸밈 노동의 시간이 짐작된다. 결국 그것들은 내가 할 작업이라 일컫는 창작 활동의 종류로 나타난다. 오늘은 목 폴라티와 펑퍼짐한 고무줄 조거팬츠.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다. 후드티와 청바지. 나가서 패드로 그림 작업을 하는 날이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흔적의 정체 모를 목 늘어난 티셔츠, 그리고 냉장고 바지. 집에서 유화 작업을 하는 날이다. 마지막으로 운동복. 운동복을 입고 작업을 하는 건 매우 특수한 경우다. 운동을 가야 하는데 정말 바쁜 마감이 있는 것처럼 일을 처리해야 할 때. 이 건은 보통 며칠간 마무리하는 일을 미룬 내게 주어진다. 나를 속이는 한 방법이다.
그 어떤 규율이 없는 상태에서 나를 제어하는 힘은 이러한 자신만의 나 사용 방법에서 나온다. 하지 않는 사람을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은 나에 관한 데이터들로 형성된다. 이 절차 속에 꽤 큰 대목으로 옷을 어떻게 분류하고 관리하며 착용하느냐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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