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예술의 경계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의 융합 가능성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의 융합 가능성

월간기후변화 2024-11-30 11:20:00 신고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이자 로마 황제로서 삶의 고통을 철학적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을 때, 그는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가? 그러면 신에게 아이를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대신, 이 슬픔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물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토아 철학의 실천적 태도를 보여줬다. 또 다른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노예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삶을 연극에 비유하며, 왕의 역할이든 노예의 역할이든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스토아 철학은 삶의 본질과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갈등과 융합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신의 섭리로 설명했고, 초기 과학자들 역시 자연의 법칙을 신의 뜻으로 간주했다.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이 천체의 움직임과 만유인력을 발견했을 때조차, 그들은 이를 신의 설계로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치며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점차 분리되기 시작했다.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적, 문화적 영역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고, 자연과학은 물리적 세계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 분리는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두 영역 간의 단절을 심화시켰다.

 

에드워드 윌슨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로 "통섭(consilience)"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적 토대 위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인간의 살림살이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그 기저에는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자리한다. 심리학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생물학적 연구를 필요로 하며, 생물학은 화학적 구조와 분자 수준에서의 이해를 통해 더욱 깊어진다. 따라서 윌슨의 관점에서 볼 때, 학문들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 두뇌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원리를 과학적으로 밝히고, 이를 기반으로 예술 창작의 공식을 만든다면 예술 역시 객관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광고와 홍보 분야에서는 두뇌 생리학 연구 결과를 활용해 소비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할 위험도 내포한다. 예술은 주관적 경험과 감정의 영역으로, 이를 완전히 객관화하려는 노력은 예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억압할 수 있다.

 

과학이 인문학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문제를 야기했다. 나치주의자들은 우생학이라는 과학적 이론을 악용해 특정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정당화했다. 자연선택이라는 생물학적 원리를 인간 사회에 적용해 강한 민족은 살아남고 약한 민족은 사라져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처럼 과학이 객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윤리적 판단을 무시하면, 큰 비극이 초래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과학적 연구 결과는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 결과가 절대적인 진리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동물성 지방의 유익성과 해로움, 조기 영어 교육의 효과 등 많은 과학적 주장들이 시간이 지나며 뒤집힌 사례는 흔하다.

 

반대로, 인문학이 자연과학의 영역을 침범했던 사례도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효를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관에 따라 거미를 비윤리적인 곤충으로 간주했다. 어미 거미가 자신의 몸을 희생해 새끼를 낳고, 새끼가 어미의 몸을 먹고 성장하는 모습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의 복잡한 생태적 균형을 간과한 인문학적 판단에 불과했다.

 

 

결국, 과학과 인문학은 각자의 영역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윌슨의 통섭은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과학적 접근의 한계를 경고한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으며, 인간의 삶은 과학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인문학은 인간의 주관적 경험과 가치를 다루며, 과학이 제공할 수 없는 깊이를 제공한다. 반면, 과학은 인문학이 다룰 수 없는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며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 두 분야가 대립하는 대신 협력할 때, 우리는 보다 풍요롭고 균형 잡힌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원본 기사 보기: 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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