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어떤 율법 학자가 예수에게 물었다.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질문과 답변은 모든 종교에서 빠질 수 없는 과정이다. 질문한다는 건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애타게 진리를 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물음에 예수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들을 만나 초주검이 돼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런데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고, 한 레위 사람도 그 사람을 보고는 반대쪽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여행 중인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었다.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2데나리온을 주면서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는 비용이 부족하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 말했다."(누가복음 10장)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황금률'을 설파했다.
서양 많은 화가가 누가복음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는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1849)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덕분에 더 유명해졌다.
들라크루아와 프랑수아 밀레(1814∼1875)를 특히 존경한 고흐는 두 거장 선배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를 자주 했는데, 고흐가 재해석해 그린 작품 중 하나가 '착한 사마리아인'(1890)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상처를 입은 사람을 힘겹게 말에 태우는 장면이다. 고흐 특유의 붓질이 눈에 띄지만, 두 사람 위치와 옷 색깔이 바뀌었다는 점을 금세 알 수 있다.
부상자를 살리려는 사마리아인의 애씀과 자기 몸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긴 부상자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굳건하게 꼿꼿하게 선 말은 두 사람을 돕는 듯한 자세다. 뒤로는 이들을 외면하고 돌아선 이가 작게 그려져 있다.
이 일화를 좀 더 직설적으로 그린 다른 화가 작품을 보자.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 화가인 피터르 라스트만(1583∼1633)이 그린 작품(1615)이다.
조금 뒤에 같은 네덜란드 화가인 얀 비난츠(1632∼1684)가 그린 작품(1670)도 흡사하게 묘사했다. 두 작품은 성경에 적힌 대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사마리아인의 치료 행위를 구체적으로 그렸다.
어떤 장면을 취해 그림으로 표현하는가 하는 선택은 화가 고유의 창조행위다. 들라크루아가 먼저 그리고, 고흐가 감응해 그린 이 장면이 제시하는 강조점은 무엇일까?
보다 강력한 '몸'의 역할이다. 신체와 근육이 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 접촉면이 최대가 됐다. 성서 이야기를 알든 모르든, 이 그림을 마주하는 감상자는 위 두 네덜란드 화가 작품보다 더 강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말이나 생각의 결과가 아니다. 내 몸을 일으켜 내 몸으로써 땀을 흘릴 때 훨씬 값진 일이 된다.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 건 죽기 두 달 전쯤이었다. 그가 다작하던 시기였지만, 들라크루아 작품에 이입돼 그린 이유를 상상해봤다.
부상한 환자가 고흐 자신이며, 어떤 이가 자신을 구제해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당시 그와 그 주변 물질적·정신적 처지는 고흐 스스로 최악 중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비극적인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그를 떠올리며, 자신을 구원하는 건 '어떤 이'가 아니라 '자신'이어야 함을 되새긴다.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흐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너무 괴롭혔다. 그 비극이 못내 안타깝다.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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