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그리마(이하 조지프) 나는 건축을 공부했지만 건물을 짓는 일보다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지식을 교환하는 ‘상황’을 만드는 데 늘 관심이 많았다. 첫 직장인 〈도무스 DOMUS〉에서 에디터로 3년간 일하다 2007년 뉴욕 소호 지역의 비영리 전시공간 ‘스토어프런트 포 아트 앤 아키텍처(Storefront for Art and Architecture)’를 맡게 됐다. 무척 협소한 공간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건축과 디자인, 예술을 아우르는 이벤트를 기획했는데, 온갖 제약 속에서 잠재력을 발견하는 매력이 있었다. 당시 선보인 프로젝트가 매스스터디스 조민석 건축가의 ‘링 돔(Ring Dome)’ 파빌리온이다. 돌아보니 올해 조민석이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선보인 것보다 20년 앞선 셈이다(웃음).
발렌티나추피(이하 발렌티나)런던에 있는 ‘시즈(Seeds)’ 갤러리에서 컬렉팅 디자인 관련 프로그램을 큐레이팅하고, 갤러리 웹사이트의 그래픽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다. 디자이너와 작품을 선정하는 것과 대중에게 보여지는 방식을 결합하는 훈련을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닐루파 갤러리(Nilufar Gallery) 큐레이터로 일할 수 있었고, 동시에 밀란 디자인 위크 기간에 열리는 여러 행사에도 참여했다. 큐레이터가 되기 전에는 수년간 디자인 저널리스트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때 썼던 기사들이 내 큐레이션의 밑바탕이 된 것 같다.
발렌티나 큐레이터로서 내 역할은 프로젝트 전체 커뮤니케이션을 주관하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할 때마다 내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베데트를 통해 그래픽 디자인 컨셉트를 잡는다. 보도 자료뿐 아니라 프로젝트 웹사이트, 비주얼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글을 작성하며 프로젝트의 서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이미 큐레이터들이 하고 있는 일이지만, 나에겐 그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보여지는가’가 중요하다. 1차적으로 훌륭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프로젝트 못지않게 중요하다.
조지프내 관심사는 언제나 전시와 집필, 영상, 건축을 향해 있었다. 모두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어떤 유형의 일을 하는가보다 ‘어떤 아이디어를 품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뉴욕에서 돌아와 다시 〈도무스〉 편집장을 맡았고, 이후 스페이스 캐비아를 설립했다. 나에겐 이 모든 여정이 같은 일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발렌티나 현재 내 관점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큐레이팅 기준은 수없이 본 많은 전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술 기호학을 전공한 대학생 시절엔 매주 10~15개의 전시를 관람했고, 논문을 쓸 땐 유럽 전역을 돌며 알코바처럼 산업공간에서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현대미술관을 방문했다. 어떤 전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만큼 큰 자국을 남긴다. 스무 살에 테이트 모던의 〈센세이션 Sensation〉과 올라퍼 엘리아손이 터빈 홀에 선보인 설치미술 작품은 여전히 강한 충격으로 남아 있다.
알코바 외에 발렌티나가 큐레이터로서 성과를 보인 프로젝트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닐루파 갤러리에서 진행한 〈Far〉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FAR 2019〉가 의미 있었는데, 현재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오드리 라지(Audrey Large)를 비롯해 다양한 신진 디자이너들을 대대적으로 조명했기 때문이다. 조지프 그리고 스페이스 캐비아가 만든 초대형 플라스틱 방울은 전시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전시공간이지만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것, 즉 사람들에게 다양한 순간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이동 경로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녹여내고, 정보와 지식의 하이어라키(Hierarchy)를 깊게 고민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재료다. 하나의 전시를 위해 너무 많은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 이런 관습을 깨기 위해 지난 4~5년간은 자르거나 구부리는 등 일절 가공하지 않고, 재사용될 수 있는 재료를 썼다. 지난해 말에는, 로마 막시(Maxxi) 뮤지엄에 전형적인 이탈리아산 테라코타 벽돌 여덟 가지를 쌓기만 해 알바 알토에 관한 전시를 구현했다.
알코바가 꾸준히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회자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공간’의 역할이 크다. 매년 다른 장소에서 독특한 경험을 제공해 왔다
조지프 전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데 알코바를 진행할 땐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채울지 그 모든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청중의 경험에 관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일 수 없다는 것’은 알코바만의 강점이다. 매번 다른 장소에 갈 수 있다는 것 역시 특권이고. 콘텐츠뿐 아니라 ‘컨테이너’를 탐색하고 그것을 경험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알코바를 디자인 전시인 동시에 건축 전시라고 생각한다.
조지프 맞다. 발렌티나와 스튜디오 베데트는 비주얼 아이덴티티에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고, 나와 스페이스 캐비아는 풍부한 공간 디자인 경험이 있어 서로 보완된다. 같은 맥락에서 또 다른 비결은 음식과 음악, 조명 등 다양한 분야의 재능 있는 동료들과 네트워크가 잘 구축돼 있다는 것이다.
한편 공간은 전시를 이루는 많은 요소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공간 외에 중요한 재료는 또 무엇이 있을까
조지프 콘텐츠와 참가자(사)다. 초창기 발렌티나와 알코바를 설립할 때, 전시 스펙트럼이 무척 넓어야 한다는 목표가 분명했다.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폭넓게,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소재에 집중한 작품부터 사회 문제, 기술을 강조한 것까지. 이런 연유로 갓 대학을 졸업한 디자이너가 엄청난 작품을 선보이는 순간과 만나기도 한다. 반대로 큰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나 비영리단체가 참가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것, 즉 다양한 주체들의 대화를 큐레이팅하는 것이 우리 일이다.
발렌티나 프로젝트의 본질상 쉽게 정형화되지 않을 것이다. 매번 장소가 바뀌고, 그렇지 않을 경우 새로운 공간을 추가하니까. 또 전시하는 모든 것은 동시대성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동시대성이란 늘 변하는 것이기에 2018년 전시와 2025년 전시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지난해에는 마이애미로도 진출했다. 새로운 도시에 가니 또 다른 어려움이 있더라. 정형화만큼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두 사람이 그간 선보여온 것은 전통적 개념의 예술 전시는 아니다. 무엇이 디자인 전시와 미술 전시를 구분할까
발렌티나 디자인과 가구 전시에는 미술 전시보다 훨씬 정교한 설정이 필요하다. 미술 전시는 순수하게 작품의 컨셉트와 의미에 초점을 맞추면 되지만, 디자인 전시는 사람들의 실제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험과 사용 방식을 제안해야 하니까. 본질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조지프요즘 디자인 전시는 점점 미술 전시처럼 변하는 경향도 있다. 디자인을 개념적 차원에서 다루는 시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디자인 전시는 미술 전시보다 물질적 존재감이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고, 내러티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높다. 사실 미술 전시 중엔 다소 어렵고 난해한 것도 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좀 더 쉽고 의미 있는 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발렌티나 알코바는 내가 관리하는 수많은 프로젝트 중 하나다. 스튜디오 베데트 팀은 현재 10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 중이다. 각 프로젝트의 비주얼 아이덴티티와 웹 인터페이스, 커뮤니케이션, 소셜 미디어 전략, 사진 촬영, 저작권 작업, 프로젝트 네이밍 등을 진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냐고? 스튜디오 분위기를 즐겁고 밝게 유지하는 게 비결이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클라이언트로부터 상식적이지 않은 반응이 돌아와도, 긍정에너지를 잃지 않고 서로 도와주며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한다. 일을 떠나 나를 아껴주고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건 큰 행운이니까.
조지프번아웃을 다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완전히 피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지난 20년간 번아웃을 겪어온 내게 번아웃은 일상이다(웃음). 최근 좀 더 여유를 찾기 위해 가족과 함께 밀란을 떠나 이탈리아 중부 시골로 이사했다. 명상과 사색에 제격이다. 가급적이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순간을 줄이고, 보다 집중적으로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 목표다.
두 사람의 행보로 알 수 있는 것은 큐레이팅의 결과가 꼭 전통적 전시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잡지와 영화, 심지어 움직이는 도시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제약 없이 세상에 이벤트를 선보일 수 있다면
조지프 모든 차원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전시를 꿈꾼다. 이를테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은 어떨까? 섬 전체를 통합적인 예술 무대로 디자인하는 것이다. 건축과 미술, 디자인, 공연 프로젝트가 동시에 펼쳐지는 그곳으로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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