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잡채는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음식이다. 우리네 잔칫상에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요리다.
생일잔치, 결혼 피로연, 환갑잔치에도 늘 잡채가 나온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품격 있고 화려한 음식이다.
결혼식 피로연을 식당에서 할 때라도 잡채는 혼주 집에서 별도로 만들어서 상에 올렸다. 이렇게 한국인의 잡채 사랑은 유별났다.
필자가 어릴 적 일이다. 아버지는 가을날 비가 온 뒤에 아들을 산에 자주 데리고 갔다. 갈 때는 끈을 묶은 망태기를 어깨에 메고 따라갔다.
오늘날의 배낭이다. 당시만 해도 산은 거의 민둥산이었다. 시골집은 나무로 난방과 취사를 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만 큰 나무가 있었다.
산 중턱에서 아버지는 참나무 그루터기를 가리키며 "저기 버섯이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로 가리키는 곳을 보면 황색의 글쿠버섯이 무리를 지어 솟아있었다. 부근 몇 군데서 버섯을 따면 금방 한 망태기가 됐다.
아버지는 나무를 한 짐, 나는 버섯을 한 짐 메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가 부엌의 가마솥에 불을 지펴 끓으면 소금을 넣고 버섯을 데쳐 우물가에 씻어서 버섯을 먹기 좋게 찢어서 물기를 뺐다.
어머니는 부엌 아궁이에서 숯불을 꺼내 삼발이를 놓고 솥뚜껑을 올렸다. 솥뚜껑이 달아오르면 들기름을 뿌리고 다진 마늘, 손질한 버섯, 쪽파, 불린 당면과 묵은 간장을 넣고 볶았다.
아궁이 옆에서 기다리는 나에게 어머니는 볶아 완성한 잡채를 주셨다. 버섯에서 닭고기 맛과 향기가 났다.
이런 글쿠버섯은 뽕나무버섯(개암버섯)이라고도 불렸다. 가을 산을 삽시간에 점령했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는 그때를 잘 알고 계셨다.
예부터 뽕나무버섯의 효능은 항암효과가 뛰어나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데도 효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야맹증, 피부건조증, 호흡기질환, 소화기염증, 점막 분비 능력 감퇴, 불면증, 구루병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손자병법에 '적의 자원을 활용하라'는 내용이 있다. 손자는 아군의 물자 소모를 줄이기 위해 적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했다.
전쟁 중에 적의 자원을 빼앗아 아군의 보급에 사용하는 것은 국가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적국의 힘을 약화하면서 동시에 아군의 자원을 보충하는 이점이 있다.
잡채가 이러한 전략과 비슷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주재료인 당면은 아무 맛도 없다. 그냥 담백하고 밋밋하다. 이런 당면이 적(?)의 자원인 다양한 재료와 만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맛과 가치를 창출한다. 마치 조화와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카멜레온 같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소불고기, 순대, 감자탕, 만두 등에도 들어가지만 이름이 바뀐다. 순대 당면, 당면 만두 등이 그 사례다.
당면이 들어가는 야채와 버섯, 고기 등도 그렇다. 야채 잡채, 버섯 잡채, 고기 잡채 등이다.
이처럼 당면은 적의 자원인 재료에 따라서 변하는 카멜레온이다. 당면은 그 이름만 들어서는 중국이 원산지다. 그렇다고 당나라 때의 음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청나라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고 해서 호(胡)가 붙은 호면이라고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한족의 음식이란 의미에서 당(唐)을 써서 당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당면'이라는 이름 자체는 한국에서 붙인 새로운 명칭이다. 중국에는 당면이라는 말이 없다. 중국에서는 당면을 '펀탸오'(粉條) 혹은 '펀쓰'(粉絲)라고 부른다.
재료는 보통 고구마, 녹두, 감자의 전분을 주로 사용한다.
녹말의 3분의 1 정도에 55℃ 내외의 뜨거운 물을 붓고 반죽해 풀처럼 만든다. 여기에 다시 나머지 녹말을 붓고 저으면서 그것을 25∼35℃도 정도의 물을 붓고 치댄다.
이 반죽을 국수틀에 눌러서 뜨거운 물이 담긴 솥에 뽑아낸 다음에 식혀서 햇볕에 말리면 '펀탸오' 곧 당면이 만들어진다. 오늘날 밀면이나 냉면을 뽑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녹말 국수인 당면에는 저항성 녹말이 들어있다고 한다. 저항성 녹말은 체내 소화효소에 의해 잘 분해되지 않는 탄수화물이다. 이런 저항성 녹말이 대장의 폴립을 치료하며 암과 당뇨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 콜로라도대 의대 연구팀에 따르면 소장에서 소화되지 않는 저항성 녹말은 대장에서 발효해 좋은 박테리아의 성장을 촉진하며 건강에 이로운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저항성 녹말은 식이섬유와 비슷하지만, 건강에 좋아 만병통치약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대장에서 암으로 변화할 위험이 있는 폴립을 죽이고 두 번째로 인슐린 감수성을 높이고 혈당을 조절해 당뇨를 예방한다.
또한 건강한 체중을 유지해주고 염증을 줄여주며 궤양성대장염, 크론병 등의 염증성 장 질환을 예방한다. 마지막으로 대장에서 유익한 박테리아의 성장을 돕는다.
또한 불용성 섬유질처럼 대변의 양을 늘려주며 변이 장을 통과하는 시간을 단축해준다고 했다.
약선에서 고구마 당면은 카로티노이드(carotenoid, 광합성을 돕고 자외선의 유해 작용을 막는 일종의 식물 색소) 수치가 높고 비타민A가 풍부해 눈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항산화, 노화 방지, 암 예방 효과도 있다. 더불어 리보플라빈(비타민 B2로 수용성 비타민의 한 종류) 및 니코틴산(비타민 B3로 수용성 비타민의 한 종류)을 비롯해 비타민 B1부터 B6까지 골고루 들어있다고 한다.
감자 당면은 소화를 개선하고 에너지 공급원인 글루텐의 대체재로 좋고 피부를 건강하게 하며 혈당 조절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장내 미생물 균형 유지하고 포만감을 증가시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며 알레르기 반응을 감소시켜 피부를 진정시킨다.
녹두 당면은 인체에 쌓이는 나쁜 독기를 해독해 혈중 지방을 낮춰주고 안구 출혈이나 고혈압, 부종 등을 예방하는 데 좋다고 한다. 단, 녹두 당면을 사용할 때는 토마토는 함께 쓰면 안 된다. 잡채에 들어가는 다양한 채소와 버섯 등은 영양의 균형을 맞추고 항산화, 면역력 강화 효과를 제공한다.
소고기, 돼지고기 등 다양한 육류는 단백질과 풍미를 제공한다. '음식디미방'에 잡채는 지금과는 달리 당면은 들어가지 않았다. 갖은 재료를 일일이 채 썰어 볶아서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즙액을 뿌린 다음 천초, 후추, 생강가루를 뿌려 맛을 냈다고 한다.
즙액은 꿩고기인 생치를 삶은 국물에 된장 거른 것을 섞고 밀가루를 풀어 끓여서 걸쭉하게 만들었다. 잡채에 당면이 들어간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보고 있다. 1919년 조선 사람 양재하가 황해도 사리원에 광흥공장이라는 대규모 당면 공장을 건설했다.
공장은 일본에 수출할 정도의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췄다. 당면은 녹말로 만들어져 잘 부서지지 않으며 양념 흡수력이 좋고 쫄깃한 식감으로 탕, 전골 등 다양한 음식에 부재료로 사용될 수 있어 인기가 좋았다.
여기에 대량 생산 시스템이 갖춰져 많은 한국 음식에 이용할 수 있게 됐다. 1934년에 이석만이 편찬한 '간편조선요리제법'(簡便朝鮮料理製法)과 1934년 영목상점이 발행한 '사계(四季)의 조선요리'(朝鮮料理), 1939년 방신영이 발간한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1943년 조자호의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 등에서도 잡채의 재료로 당면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잡채는 17세기 조선시대 광해군 재위 시절에 궁중 연회에서 처음 선보인 것으로 알려진다. 잡채가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임금이 식사 때마다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고 한다.
잡채는 단순히 맛있는 요리가 아니다. 재료의 조화를 통해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상징적인 음식이다. 또한 잡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음식이다.
건강과 맛을 겸비한 잡채는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며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남을 것이다.
요즘 MZ세대가 자주 쓰는 신조어 주 하나인 "000, 그 잡채!"라는 말이 있다. 그 자체를 소리 나는 대로 써서 트위터에서 '밈'으로 돌아다니다가 신조어가 됐다. 그중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행복, 그 잡채'다.
이처럼 "000, 그 잡채!"는 실제 음식 잡채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단어에 붙여도 조화를 이루며 뜻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잡채는 그야말로 '카멜레온, 그 잡채'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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