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피고인 이재용은 2014년 5월경 상속세 마련 등을 위해 골드만삭스와 함께 삼성생명 지분 매각 추진에 착수해 매각 조건 등을 논의하고 인수자를 물색하던 중, 2015년 2월 중순경 인수협상자를 워렌 버핏(Warren Buffet)이 운영하는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로 정하고 워렌 버핏과 매각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고, 매각 협상 방법 및 매각 조건 등 구체적 매각 방안을 마련해 협상을 추진했다.”
2016년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진행하면서 검찰이 공소장에 적시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삼성그룹이 삼성생명 지분 매각을 은밀하게 진행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마련된 매각 방안은 삼성생명을 사업회사와 지주회사로 인적분할한 후 총수 일가는 지주회사 지배권을 확보하고 버크셔 헤서웨이는 사업회사 경영권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삼성은 버크셔 해서웨이에 삼성전자 지분을 7~10년간 보유하며 삼성에 우호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하는 이면 약정도 비밀리에 제안했다. 혹여 문제가 생기면 ‘워렌 버핏이 먼저 거래를 제안했다’는 ‘오리발 작전’까지 마련했다. 이재용은 2015년 7월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워런 버핏을 직접 만나 이 같은 매각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까지 했으나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에 엮이면서 성사에 이르지는 못했다.
■ 삼성생명 지분 매각 위해 워런 버핏까지 만났지만...
3세대까지 삼성 총수 일가는 삼성생명을 통한 삼성전자의 간접 지배까지는 성공했으나 늘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삼성생명법’이 현실화되면 총자산의 3%를 초과하는 삼성전자 지분의 강제 매각으로 그룹 지배구조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이재용과 워런 버핏의 만남은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마련된 고육지책이었다.
그룹 핵심인 삼성전자에 대한 직접 지배가 어려우면 간접 지배라도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했다. 삼성그룹 3세 세습의 종자기업인 삼성에버랜드는 제일모직의 패션 사업 부문을 양도받은 뒤 2014년 상장하면서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변경했다. 제일모직은 이듬해 다시 삼성물산과 합병하면서 사명을 삼성물산으로 바꿨다. ‘편법 승계’ 낙인이 찍혔던 삼성에버랜드는 두 번의 합병을 거치면서 ‘삼성물산’으로 환골탈태했다. 이를 통해 그룹의 순환출자가 해소되고 총수 일가의 삼성전자 지배력도 높아졌다. 하지만 마무리가 깔끔하진 못했다. ‘총수 구속’이라는 대형 악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불거진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 승계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5일 항소심 결심 공판의 최후진술에서 이재용 회장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주주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투자자들을 속이려는 의도는 결단코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검찰의 수사 내용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1대 0.35)은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너무나 불리한 비정상적 셈법이었다. 삼성물산 최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은 내부적으로 적정한 합병 비율을 1대 0.46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1대 0.35 비율로 합병이 진행되면 약 3500억원의 부당한 손실을 입는 셈이었다. 이는 강제 징수되는 국민의 연금 자산이 재벌 총수 일가에게 무상으로 제공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민의 피해는 아랑곳없이 삼성은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 및 비선 실세 최순실과의 거래에 나섰다.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204억원의 출연금과 함께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게도 승마 지원 명목으로 213억원을 약속했다. 삼성에게는 푼돈에 가까웠지만 돌아온 열매는 달콤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에 합병 찬성 압력을 넣었고, 일은 삼성의 뜻대로 풀려나갔다. 국민연금은 합병 이사회 의결 전 삼성물산 주식을 지속적으로 대량 매도해 삼성그룹을 물밑에서 도왔다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받았다. 그룹 비서실인 미래전략실은 합병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주가 조작’ 계획을 미리 마련해 그대로 진행한 것도 추후 드러났다. 자본시장법 위반 등 19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회장 등 14명에 대한 항소심은 내년 2월 선고를 앞두고 있다.
■ 삼성전자 지배력 높이려다 이재용 구속 '악몽'으로
문제는 2심 재판이 마무리되더라도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홍라희·이재용·이부진·이서현 등 총수 일가의 삼성전자 지분율(5.45%)은 지난 4년 간 상속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 4.86%까지 낮아졌다. 앞으로 두 차례 총 4조원 규모의 상속세를 더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지분율은 더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고령의 홍라희 여사 지분이 대거 처분될 것이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낮아진 지분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대책이 필요한 상황.
김수현 DS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자사주 매입·소각은 가장 효과적으로 총수 일가 지배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이라며 “향후 19조원 이상의 자사주 매입 소각을 단행할 경우 총수 일가 지분율은 5%대 회복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지난 15일 발표된 삼성전자의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과 관련해 주가 관리 목적 외에 총수 일가의 지배력 회복 효과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견해다. 총수 일가의 주식담보대출 상황이 자사주 매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홍라희·이부진·이서현 모녀는 지금까지 삼성전자 주식담보대출을 상속세의 주요 재원으로 활용해 왔는데, 삼성전자 주가가 5만8000원 아래로 떨어질 경우 추가 담보가 제공돼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사주 매입·소각 뉴스의 이면에는 이런 총수 일가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지배력 확대를 위한 삼성SDS 분할·합병 시나리오도 제기된다. 삼성SDS의 IT 부문은 삼성전자로, 물류 부문은 삼성물산으로 각각 합병시켜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높이는 작업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 삼성물산과 삼성SDS가 보유 중인 현금성 자산을 활용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보유 지분을 사들이면 삼성전자를 간접지배가 아닌, 직접지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시나리오다. 최근 삼성전자 주가가 급락한 것도 지배구조 개편 측면에선 호재다.
실제로 삼성그룹은 2016년 삼성SDS 분할·합병을 추진했지만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못했다. 내년 2월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2심 재판의 결과가 무죄로 나올 경우 총수 일가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선택지일 수 있다. 다만, 삼성그룹 지배구조와 관련된 과거 수많은 사례들에 비춰봤을 때 총수 일가와 소액주주 간 이해관계가 일치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큰 잡음 없이 작업이 진행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 삼성전자 지배력 숙제는 '현재진행형'...SDS 활용 시나리오
올해 국내 자본시장의 성적표는 ‘폭망’ 수준에 가깝다. ‘4만 전자’를 경험한 코스피지수는 2400선까지 후퇴했고, 올 3분기 국내 주식시장의 일평균 거래대금(17.4조원)은 전년에 비해 23.4% 급감했다. 반면, 같은 기간 해외주식 거래대금은 80% 급증했다. “아직도 국장에 투자하나요?”라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투자자들 사이에선 상식처럼 오가는 요즘이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선포한 ‘밸류업 원년’의 성적이 이 모양이다.
국장이 이렇게 망가진 데에 삼성그룹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삼성생명 주식의 차명 관리 및 세금 포탈, 3세 세습을 위한 종자기업의 활용과 일감 몰아주기, 비상장기업의 상장차익 몰아주기, 상식 밖 인수합병을 통한 세습 강화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덕분에 올해 발표된 밸류업 지수 리스트에 삼성그룹 종목은 삼성전자, 삼성화재, 제일기획 등 달랑 3개밖에 포함되지 않았다. 생보업계 부동의 1위인 삼성생명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타 공인 초일류기업이 유독 지배구조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후진성의 극치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오로지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편법은 물론, 임직원들을 범법자로 만드는 위법·불법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삼성이 지난 세월 보여준 ‘흑역사’는 그대로 다른 기업들에 답습되는 커다란 부작용까지 낳았다. 창업주가 내건 ‘사업보국’의 기치에 과연 진정성이 있었는지 의심을 사고도 남을 수준이다.
거대 야당은 급기야 보험업법 개정이 아닌 상법 개정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불공정 거래를 하고 주가조작을 해도 힘만 있으면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고 온 세계에 광고를 하는 중인데 누가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를 하겠느냐”며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상법 개정을 반드시 이번 정기국회 내에 해내겠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인협회 등 재계는 긴급 성명을 내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지만 과연 동학개미와 서학개미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재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린 ‘흑역사’의 골이 너무 깊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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