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스 바자 지금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헤어스타일을 만드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봤더니 바로 가베가 떠오르더라고요. 독창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건 물론 글로벌 팬덤을 가진 아티스트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으니까요. 지난해 영국 패션협회에서 선정한 2023 뉴 웨이브 크리에이터 리스트에도 올랐죠.
가베 어느 날 메일이 왔어요. 영어로 되어 있으니까 스팸메일인 줄 알고 넘겼는데 계속 오는 거예요. 그래서 글로벌 에이전시에 물어봤더니 “너 여기 뽑힌 거야”라고 얘기하더라고요. 해외의 모르는 사람들이 내 작업물에 관심을 갖고 심지어 주목해야 할 헤어스타일리스트로 뽑았다니 너무 영광이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열심히 하다 보니 성과도 얻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큰 동기부여가 되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작업물이 일반적이지 않은데 창의력은 타고난 건가요?
가베 글쎄요. 저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요. 재능보다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많은 이미지와 그걸 구현할 수 있는 테크닉이 더 중요하죠. 이미지는 많이 보고 기억하면 채울 수 있고 테크닉은 연습하면 늘어요. 결국 재능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예요. 하지만 노력하려면 일이 즐거워야 해요. 힘들어도 나랑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즐겁다면 재능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요. 헤어숍을 운영하던 20대 후반에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머리를 만지는 게 좋아서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됐는데 매장 운영과 직원 관리에 쓰는 시간이 더 많았죠. 그땐 성격도 딱딱해지고 일이 재미가 없었어요. 그 시기에 손님의 완성된 헤어스타일을 촬영하던 내부 포토그래퍼가 개인 작업을 함께해보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 뒤로 제 인생이 바뀌었죠.
하퍼스 바자 우리가 아는 가베가 탄생한 순간이군요.
가베 개인 작업을 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사실 헤어숍에서 하는 일은 비슷해요. 매장마다 시그너처 스타일이 있어서 비슷한 커트를 매일 반복하는데 어느 순간 지겹더라고요. 머리를 만질 때 내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잊은 거죠. 그런 와중에 다시 행복을 찾았으니 얼마나 즐거웠겠어요. 매장 운영은 뒷전이 됐죠. 독창적인 스타일링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 독립하게 됐어요.
하퍼스 바자 어린 나이가 아니었을 텐데 성공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나요?
가베 그때가 서른여섯 살이었는데 자신감은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먹고살 수 있을 정도는 될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돈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하퍼스 바자 〈바자〉와 같은 매거진과 주로 작업하는 프리랜스 헤어스타일리스트는 몇 년간 어시스턴트로 배우다 독립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초반에는 일을 의뢰받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가베 맞아요. 하지만 굉장히 운이 좋았어요. 인스타그램이 주목받기 시작한 때라 작업물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었죠. 지금은 유명해진 사진가 조기석, 민현우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만나 작업하던 친구들이에요. 작업물을 보고 연락이 오면 서로 소개시켜주면서 일을 시작하게 됐죠. 같은 시기에 비슷한 위치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 함께 협업하다니. 운과 타이밍이 너무 좋았죠.
하퍼스 바자 그동안 선보인 나무, 자개 등의 시리즈를 함께 만든 사람들이겠군요. 그런 작업을 통해 당신의 스타일이 정립되었나 봐요. 어떤 사진은 딱 보자마자 ‘이 헤어스타일은 가베가 연출했다’라고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당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그너처 스타일을 보여달라고 요청했고요.
가베 한국적인 요소와 곡선을 사용하는 것이 저의 시그너처라고 생각해요. 요즘 ‘흐름’이라는 주제에 꽂혀 있는데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거나 힘들면 기분이 가라앉잖아요. 그때 느껴지는 아래로 흘러내리는 감정을 표현했어요.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곡선을 연출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죠. 동양인의 모발은 굵고 탄력이 높아 자연스러운 곡선을 만들기 어려워요. 일반적인 헤어 제품으로는 원하는 휘어짐을 표현할 수 없어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가 전분에서 답을 찾았어요. 모발이 부드럽게 구부러지고 마르면 단단해지더라고요. 그렇게 5일간 바르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한 결과물입니다.
하퍼스 바자 한국적인 요소를 담는 건 당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이겠죠?
가베 ‘우리 문화를 담아야겠다’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냥 살아오면서 보고 만졌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 같아요. 자개를 쓴 것도 할머니 집에 자개장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익숙한 건 굉장히 중요해요. 내가 어떤 주제와 의도를 전달할 때 상대도 그것에 익숙해야 더 와닿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작업할 때도 익숙한 것에서 주제를 선택하거나 포인트를 잡는 편이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아무래도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나 곡선 같은 요소가 친근해요.
하퍼스 바자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도 한국적인가요?
가베 누구나 봤을 때 예쁜 거죠. 그러면서 과하지 않고 조화로워야 해요. 머리카락을 땋아 나뭇가지를 만들고 자개 장식을 붙이는 걸로 유명해져서 아티스틱한 작업으로 저를 많이 찾고 있지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행복하고 예쁘고 내추럴한 스타일도 잘 한다고요.
하퍼스 바자 대표적인 작업물은 머리카락을 가지처럼 만들어서 거대한 나무를 연출했던 거예요.
가베 당시에 머리를 땋아서 나무 모양으로 만드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이번엔 엄청 크게 해볼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촬영 당일 재료를 준비해서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머리 땋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금방 끝날 거라고 예상했죠. 그런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았어요.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나눠서 땋기 시작했는데 가닥이 네 가닥이 되고 여덟 가닥이 됐죠. 가지가 많아질수록 배수로 늘어나 막바지에는 80가닥이 넘더라고요. 작업이 끝날 기미가 없어서 포토그래퍼 어시스턴트까지 동원돼 머리를 땋았죠. 그렇게 꼬박 12시간을 작업하고 두 시간 동안 벽에 걸었어요.
하퍼스 바자 힘들었던 만큼 성취감이 엄청났을 것 같은데.
가베 말도 못할 만큼 큰 감동이 밀려왔어요. 눈물이 날 정도였죠. 지금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해요. 힘들었던 건 미화되고 행복한 기억만 남아요. 내가 시간을 투자한 만큼 반드시 돌아오는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런데 잡지 화보 촬영이나 개인 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기분이 확 가라앉아요. 엔도르핀이 최고조를 찍고 떨어질 때 느껴지는 무력함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우울해졌다가 자고 일어나면 작업 당시가 다시 떠오르죠. 그 성취감이 계속 반복되니까 놓을 수가 없어요.
하퍼스 바자 뉴진스의 2집 앨범과 뮤직비디오의 헤어스타일링을 담당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헤어스타일리스트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어요. 그런데 포트폴리오와 반대되는 작업이라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가베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과 달라서 초반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뉴진스가 예뻐 보이는 게 가장 중요했고 멤버별로 포인트도 살려야 했죠. 여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어떻게 잘 섞을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어요. 돌이켜보면 엄청난 공부가 됐던 시간이에요. 대중에게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 기준을 지키면서 나만의 아이디어, 테크닉, 취향을 더하는 법을 배웠거든요. 뉴진스 덕분에 저의 세계도 넓어졌죠.
하퍼스 바자 말씀하신 것처럼 보편적으로 아름다우면서 개성까지 살리는 게 정말 어려웠을 것 같아요. 앨범 콘셉트와도 맞아야 하고요.
가베 시안을 엄청나게 찾았어요. 저는 일러스트나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일러스트와 사람의 머리카락은 다르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게 표현하려면 굉장히 오래 고민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 많은 시안이 필요했어요. 그때 찾았던 시안이 지금 작업하는 데도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패션 화보와 아이돌 헤어스타일링은 무엇이 다른 가요?
가베 아이돌 헤어스타일링은 누가 봐도 예뻐야 하죠. 저는 단점은 잘 가리고 장점은 부각하되 포인트를 살리려고 해요. 너무 정형화된 스타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웨이브를 넣는다면 결을 불규칙하게 만드는 식으로요.
하퍼스 바자 〈바자〉 US 화보로 공개되었던 블랙핑크 제니의 단발도 당신의 손에서 탄생했죠.
가베 제가 INFP거든요. LA까지 가서 촬영해야 하는데 제니와 첫 작업이라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죠. 제니가 그동안 했던 헤어스타일을 전부 찾아 보고 그중에서 특히 예뻤던 스타일을 추렸어요. 그리고 캐리어 안에 담을 수 있는 가발을 모조리 챙겼어요. LA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는데 콘셉트가 내추럴 헤어더라고요. 가발을 다시 고르고 단발 스타일을 먼저 제안했는데 제니가 흔쾌히 승낙했어요.
하퍼스 바자 그 인연이 〈만트라〉 뮤직비디오까지 이어졌어요. 굉장히 많은 헤어스타일을 선보였죠.
가베 히피펌 스타일의 긴 웨이브는 제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그동안 스타일링한 걸 본 적이 없고 콘셉트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금발은 현장에 있는 모두가 환호할 만큼 예뻐서 2025 S/S 파리 패션위크 샤넬 쇼에서도 연출하게 됐죠.
하퍼스 바자 가발을 많이 사용하는데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다루기 어렵지 않나요?
가베 최대한 부피를 줄여서 그 사람의 두상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게 저희 팀의 노하우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많이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어요. 패션쇼 백스테이지 영상에서 유명 헤어스타일리스트가 가발을 씌울 때 빠르게 지나가는 스킬도 캐치하고요. 그리고 가발을 종류별로 수도 없이 샀어요. 버는 돈의 60~70%는 가발을 사는 데 쓸 정도였어요. 그러다 결국 스타일링하기 좋은 가발을 찾게 됐죠.
하퍼스 바자 가발을 사용한 헤어 화보를 함께 찍어보고 싶네요.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할게요. 헤어스타일리스트로서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가베 오래오래 일하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서도 저를 찾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함께 일하다 독립하는 후배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어요. 다른 헤어스타일리스트와 비교해 일이 많지 않지만 어시스턴트 세 명과 함께 일하는 것도 그런 이유죠. 모든 스케줄을 함께 하진 않아도 같이 하면서 최대한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최근에 이사한 작업실도 공간이 넓은 곳으로 구했어요. 큰 테이블 6개를 붙여놓고 다 같이 모여서 작업할 수 있도록 만들었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아이디어가 정말 많이 나오거든요. 제가 막히는 부분을 이 친구들이 풀어줄 수도 있고요. 작업실을 함께 쓰는 후배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물론 비용은 제가 다 부담합니다. 얼마 전에 한 명이 독립했고 다른 친구가 독립을 앞두고 있는데 그 친구들도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고 있어요. 작업실의 크기를 점점 키워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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