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법정화폐 도입은 '특수 사례'
다른 국가들, 비트코인 합법화 통한 이용에 방점
국제기구ㆍ한국도 비트코인 주목하지만…법정화폐엔 부정적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최근 '디지털 금'으로 불리는 가상화폐 비트코인의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 세계 주요 매체뿐만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고 있다.
특히, 엘살바도르에서 비트코인이 법정화폐로 통용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비트코인이 진짜 돈이 된 거냐", "비트코인이 우리나라에서도 법정화폐가 될 수 있냐"는 게시글이 적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엘살바도르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처럼 국가가 법을 통해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지정할 경우 공식 통용될 수 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주요 선진국에서는 비트코인의 법정화폐 사용을 반대하고 있고, 실제로 비트코인은 가상화폐 특성상 가격 급변동이 크고 자금세탁 우려 등이 여전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주요 국가에서 법정화폐로 도입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보는 게 맞다.
아울러 우리나라를 포함해 주요 국가들은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보다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화폐인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미 달러화와 같은 정부 발행 통화와 1대1 교환 비율을 유지하는 게 목표인 테더 등 스테이블 코인(Stablecoin)도 법정화폐의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법정화폐 도입은 '특수 사례'
비트코인의 법정화폐 여부를 알려면 엘살바도르 사례를 먼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도입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정한 법안은 47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가상화폐에 대한 양도 행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부채를 포함한 가상화폐 자산 가치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디지털 자산 시장 진흥과 디지털 자산 서비스 공급자 등록 및 관리를 담당하는 '국가 디지털 자산 위원회' 창설 근거도 담겼으며 가상화폐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근거도 담겨있다.
이처럼 엘살바도르는 2021년에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 통화로 도입한 뒤 국가 예산을 동원해 비트코인을 매입해 현재 보유 개수가 6천개에 육박하고 있다.
이를 '전략적 비트코인 준비금'(Strategic Bitcoin Reserve·SBR)이라고 부르는데, 비트코인을 통해 국가를 개조해보겠다는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돼있다.
엘살바도르는 내전으로 산업 기반이 무너져 달러를 벌어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라 비트코인 채굴을 통해 통화량을 늘려 경제 성장을 추구하려 했다. 엘살바도르는 화산의 지열을 이용해 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어 달러 발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달러를 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해외 송금 수수료 절약도 큰 이유였다. 내전 등을 피해 250여만명이 해외에 살다 보니 엘살바도르에 송금하는 규모가 2020년 기준 60억달러(한화 8조4천여억원)로 국내총생산(GDP)의 23%에 달했다. 이들이 달러를 엘살바도르에 송금하려면 수수료를 10%가량 내야 했지만 비트코인을 이용하면 수수료 부담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엘살바도르는 오랜 내전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자국 통화인 콜론(SVC)을 사용하지 않고 미국 달러를 공식 통화를 이용해왔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지정하는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취지에서 엘살바도르에 비트코인이 법정화폐로 도입됐지만 초창기에는 비트코인 투자로 60%가 넘는 손실이 나자 대규모 시위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비트코인 앱인 전자지갑 '치보' 사용자가 꾸준히 늘고 있고 최근 비트코인 시세가 급등하면서 부켈레 대통령은 일약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비트코인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은행 계좌가 없는 국민이 비트코인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전자지갑 '치보'를 개설하도록 했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 전자지갑을 개설해 사용하고 있다.
부켈레 대통령은 지난 11일 엑스에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I told you so)"고 짧은 글을 올렸다. 대내외 압력에 굴하지 않은 결과, 비트코인 투자에 성공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 다른 국가들, 비트코인 합법화 통한 이용에 방점
현재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도입한 국가는 엘살바도르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2022년 4월 경제 발전과 회복이라는 명문을 내세워 비트코인 법정화폐를 만드는 법안을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60년 전 독립했으나 고질적인 정세 불안에 시달려 유엔개발 지표상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다.
같은 달에 온두라스의 로아탄섬에 위치한 '프로스페라 경제특구'도 비트코인을 포함한 암호화폐를 법정통화로 채택했다. 이 경제특구는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카리브해 관광지인 로아탄섬 일부 지역에 2020년 지정된 것으로, 행정·재정 등에서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법화하려는 국가는 우크라이나, 쿠바, 파나마, 파라과이 등 늘어나는 추세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2022년 3월 가상화폐를 일반적인 자산처럼 거래할 수 있도록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침공으로 어려워진 국방 예산 등을 각국의 가상화폐 기부금으로 보충할 수 있게 됐고 마비된 금융 거래와 송금 시스템을 보조할 수단을 갖게 됐다.
러시아 또한 법정화폐는 아니지만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도 높은 경제 제재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활용하고 있다.
쿠바도 2021년 9월 상업 거래에서 가상화폐 사용을 허가하고 법적으로 규제하기로 했다. 쿠바에선 미국의 금융제재나 정부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가상화폐가 널리 사용돼왔다.
베네수엘라는 2018년 자체 암호화폐 페트로를 발행하기도 했으며, 파나마에서도 비트코인 법제화를 추진 중이다.
파라과이의 카를리토스 르얄라 의원은 2021년 9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합법화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엘살바도르처럼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까지 삼는 국가는 많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월가 투자가 마크 모비어스는 블룸버그TV에 "재정 문제가 심한 일부 국가는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할 수도 있다"면서도 "미국 등의 정부가 비트코인으로 세금을 받겠다고 하면 그땐 비트코인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화폐가 되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선 엘살바도르와 같은 사례가 줄 잇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국제기구ㆍ한국도 비트코인 주목하지만…법정화폐엔 부정적
비트코인은 2009년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정체불명의 프로그래머가 만든 가상화폐다.
비트코인 전용 ATM은 2013년 10월 캐나다 밴쿠버에 처음 등장했으며, 비트코인은 정식 화폐가 아니라서 각국 정부나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점 때문에 마약 거래 등에 불법 사용되기도 했다.
중국 인민은행은 논란을 빚는 비트코인의 금융기관 유통을 전면 금지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한국도 비트코인의 성장세에 주목하고 있지만 법정화폐 채택에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2013년 12월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당시 비트코인이 중앙은행에서 인정하는 법정화폐가 아니지만 키프로스 금융위기 이후 대안투자 상품으로 전 세계 주목을 받자 "규격화, 가치 변동성, 안정성을 봤을 때 현재로서는 민간 화폐로 발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더리움의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도 2017년 9월 '서울 이더리움 밋업' 강연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가상화폐보다 법정화폐가 안정성이 높아서 월급을 받거나 물건을 사는 등 전통적인 산업에서 가상화폐가 법정화폐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대신 사물인터넷이나 인터넷상에서 거래할 때 법정화폐를 보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국은행은 2018년 7월 발간한 '암호자산과 중앙은행' 보고서에서 화폐 기능을 따져봤을 때 현시점에서 가상화폐가 기존 화폐를 대체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정부가 세금을 가상화폐로 징수하지 않는 한 가상화폐가 법정화폐 자리를 차지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2021년 4월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 방향 회의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가상화폐가 지급 수단으로 사용되는데 제약이 아주 많고 내재가치가 없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국은행은 2021년 8월 '디지털 혁신에 따른 금융 부문 패러다임 전환 가능성' 보고서에서 "가상화폐는 법정화폐와는 별개로 민간 영역 일부에서 제한적 용도로 사용되면서 투자, 투기 수단으로서 관심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21년 11월 IMF는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법정화폐 채택에 재차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IMF는 엘살바도르 방문을 토대로 낸 보고서에서 "비트코인의 높은 가격 변동성을 고려할 때 법정통화로 사용하는 것은 소비자 보호와 재정 건전성, 재정 안정성에 중대한 위험을 수반한다"면서 "비트코인 법정통화 사용은 우발 부채도 야기하는 등 위험이 있어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사용돼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IMF는 지난해 2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중에 회원국들에 가상화폐 정책 대응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9개 사항이 담긴 정책문건 '가상화폐 자산 관련 효과적 정책 요소들'을 발표하면서 가상화폐에 법정통화 지위를 부여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법정화폐와는 관련이 없지만 비트코인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인정한 판결이 2018년 처음으로 나와 주목받았다.
수원지법은 2018년 1월 불법 음란물 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선고공판에서 범죄이익으로 얻은 191비트코인을 몰수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비트코인도 몰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 법률상 물건뿐만 아니라 현금, 예금, 주식, 그밖에 재산적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재산', 즉 사회 통념상 경제적 가치가 인정되는 이익은 몰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비트코인도 이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원심에서는 물리적 실체가 없이 전자화된 파일의 형태인 비트코인을 몰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나, 항소심은 게임머니도 구 부가가치세법상 재화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들어 판결을 뒤집었다. 현실적으로 비트코인에 일정한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다양한 경제활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수원지법은 "항소심은 비트코인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 범죄수익에 해당한다고 봤다"며 "국내에서 비트코인의 경제적 가치 및 몰수 대상성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로 보이나 법정화폐로서의 가능성은 본 판결 쟁점과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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