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내 새끼! 한 달 만에 많이 컸네!”
“엄마! 세 달이야, 벌써!”
“아이고, 그랬어? 엄마가 미안!”
품에서 빠져나온 정열은 청하에게도 안긴다.
“보고 싶었어, 누나!”
“그래, 나두 보고 싶었어, 빨리 못 와서 미안해.”
냉정한 청하도 동생 앞에서는 정이 많은 따뜻한 누나가 된다. 청하는 슬그머니 정 열의 손에 예쁜 연필통을 쥐여 주었다.
“누나! 너무 좋아. 고마워.”
정열은 엄마보다 청하를 따랐다. 영숙은 아들이 강하게 커주길 바랬고 그래서 살갑게 아들을 대하질 않았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이제 10살짜리 정열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사랑도 받지 못하고 영숙의 손에서 키워졌으나 영숙이 전국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아들은 항상 외로웠다. 주로 외할머니와 생활했으나 어찌 엄마만 하겠 는가? 사실은 외할머니도 일이 많아서 가정부 누나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던 할머니 구정순은 밝게 웃으며 “고생했다. 소식은 들었다.”라고 말했다.
“엄마, 허리는 좀 어때?”
몇 달 전에 허리를 다친 엄마가 걱정되어 물었다.
“니 걱정이나 하라우.”
구정순은 겸연쩍으면 가끔 개성 말투가 나온다.
“엄마도, 참!”
구정순은 개성의 거상으로 그 많았던 재산을 버리고 딸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와서 억척같이 돈을 모았다. 적산 가옥들이 나오는 대로 족족 사들였다. 광복동과 남포 동의 땅과 건물은 대부분이 박 회장, 백 회장, 구정순, 임영숙 네 사람의 소유였고, 그 중에도 구정순이 제일 많았다. 개성에 두고 온 재산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땅에 대한 집착이 유별나게 강했다. 이틀을 부산에서 지낸 영숙은 다시 서울로 갈 준비를 한다.
“엄마, 열이를 부탁해. 깨기 전에 가야 할 것 같아.”
곤히 잠들어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영숙은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걱정 마라. 애도 이제 다 컸다. 잘 버텨 줄 거다. 암 내 새끼인데. 그렇고말 고.”
“엄마.”
영숙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정열은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영숙은 부여 박 선생을 만났다.
“박 선생님.”
“임 회장, 그래 아들은 잘 만났고?”
“네…” “며칠 있다가 오지 뭐가 그리 급했길래.”
“중필이 오라버니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육사 5기생과 6기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그들이 중필이 오라버니를 견제하기 시작했어요.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머리도 식히고 무엇보다 국회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전해주세요.”
김중필은 영숙의 말에 따라 외유했고 동남아시아와 유럽 정치인들과의 교류에 집중하였다. 김중필은 귀국하자마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1963년 11월에 제6대 국회 의원에 당선됐고, 그다음 달에 민주공화당 의장에 선출되었다. 당 의장이 된 김중필에게 임영숙은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소개했다. 김중필은 1951년 육군 대위 시절에 미국 유학 장교단에 선발되어 조지아 포트베닝 육군보 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영어에 능숙한 편이었다. 김중필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교분을 쌓아 나갔고 이것은 대한민국 권력 2인자로서 위치를 굳건히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당하자 전 세계는 경악에 빠졌 다. 케네디는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닉슨을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47세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다. 세계 92개 국의 국가원수와 사절단들이 국장에 참석하였고 박종희도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인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국장이 거행되는 세인트 매튜 성당에서 박종희는 김중필이 사전에 연결한 러스크 국무장관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고, 러스크는 케네디에 이어 존슨 대통령까지 8년 이상 국무장관으로 대통령을 보필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오자, 박종희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김중필은 국회의원 정수의 63%에 달하는 110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린 민주공화당의 의장이 되어 두 사람은 대한민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64년 1월 29일,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미국 국무장관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서울 곳곳에 걸리고 신문과 라디오는 톱 기사로 다뤘다. 영접을 나간 김중필과 러스크는 반갑게 포옹했다. 러스크는 김중필보다 17살이나 많은 노련한 미국 정치인이다.
“반갑네, 이제는 의장이라 불러야겠지. 하하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사하시게, 우리 쪽 일행일세.”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방한한 다음 날, 12명의 러스크 장관 일행은 한국의 고위 당국자들과 군사 및 경제 원조에 대해 논의했다. 양국은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과 군사 및 경제 분야의 원조를 유지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러스크 장관은 박종희 대통령의 초대로 청와대로 향했다.
“대통령 각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두 달 만이지요, 이렇게 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리로 편하게 앉으십시오.”
“대통령 각하, 이번 한일회담 건으로 국민의 반감이 심할 텐데 걱정이 많으시겠습 니다.”
“아무래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은 리가 없지요. 일본은 워낙 우리 국민을 잔인 하게 핍박하고 우리의 재산과 생명을 수도 없이 빼앗아 갔으니… 아직도 일본으로 징용을 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계획도 중요합니다. 이번 한일회담을 잘 이용해서 한국의 경제 재건에 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 니다.”
하지만 한일회담은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 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을 무시하고, 경제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한 굴욕 외교가 되어버렸다. 36년간 우리를 철저히 유린한 일본에 어처구니없는 굴욕을 또 당하고 말았다. 서울에서 열린 한일 외무장관 회담이 급진전하여 1965년 6월 22일 청구권 협정을 포함한 4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 가운데 한일기본조약 비준 동의안이 1965년 8월 14일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 조약에 의해 한국과 일본은 그 이전 양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가 되었다.
서울 시내 대학생 5,000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 투쟁은 전국으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성균관대학 1,000여 명과 동국대학 1,300여 명이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였고 경찰은 32개 대학의 학생 대표 35명을 연행하였다. 점점 시위는 확산하여 서울대학 약 6,000여 명은 박종희의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 위를 벌였고, 고려대학생들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6월 3일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학생 1만여 명이 한일 수교 반대와 박종희 정권 타도를 외쳤다. 결국 밤 8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사는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사전검열, 각급 학교 무기 휴교, 통금 연장, 무 영장 체포, 구금 등을 담은 계엄포고령 1, 2, 3, 4호를 단 이틀에 걸쳐 연달아 선포하였다. 그 와중에 김중필은 민주공화당 의장직을 내려놓고, 2주일 후에 미국으로 떠났다. 부여 박 선생과 임 여사의 적극적인 제안을 김중필이 받아들인 것이다. 계엄사는 계엄포고령 5, 6호를 선포하여 전국 대학에 방학 조치를 내리고 옥내외 집회를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박종희 대통령은 유언비어 조작하는 불순분자를 철저히 엄단하라고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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