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복기하는 패션 키워드 11

올해를 복기하는 패션 키워드 11

에스콰이어 2024-11-26 00:00:01 신고

1. RUNNING IS NEW STYLE
= “달리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올해는 모두가 달렸다. 고프코어 룩에 이어 러닝코어 룩이 탄생했고, 러너들은 SNS에 자신의 아웃핏이 드러나는 셀피와 함께 러닝 일상을 매일같이 인증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패션 브랜드는 스포츠 브랜드와 손잡고 발 빠르게 전문 스포츠웨어를 출시했다. 로에베는 러너들에게서 뛰어난 착화감으로 인정받은 온러닝과 협업해 클라우드틸트 스니커즈를 출시했고, 발렌시아가는 언더아머와 함께 발렌시아가 특유의 무드를 살린 기능성 스포츠웨어를 공개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만 알던 이들도 이제는 UVU, 호카, 옵티미스틱 러너스, 새티스파이 등 새로운 러닝 브랜드를 찾아 나서는 추세다. 러닝은 이제 건강을 위한 움직임을 넘어, 개성을 드러내는 패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스포츠와 패션의 경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흐려지고 있다.



2. SENSATION
= 올해는 신선하고 획기적인 방식의 SNS 마케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해였다. 특히 빠르게 퍼져 나가는 소셜미디어의 특성을 활용한 새롭고 파격적인 콘텐츠가 유독 돋보였다. 자크뮈스는 짜임새 있는 숏폼으로 그 선두를 달렸다. 실제인지 허구인지 착각하게 하는 가상 옥외광고(FOOH)를 통해 버스만큼 커다란 가방이 도로를 지나가는 영상을 올리는가 하면, 사진가이자 세트 스타일리스트 소피아 알라즈라키(Sofia Alazraki)와 함께 제작한 숏폼, 몸보다 큰 소품을 들고 가는 모델들의 사진 등 자크뮈스가 보여준 유쾌하고 참신한 비주얼이 화제가 됐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 역시 바이럴을 똑똑하게 활용했다. 로에베 토마토처럼 생겼다며 밈이 된 토마토와 똑같은 모양의 클러치를 제작한 것. 최근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앨범 〈CHROMAKOPIA〉 홍보를 위해 앨범을 손수 포장하고 팬들에게 직접 배달하며 이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엉뚱함과 순발력, 쿨함. 바이럴의 시대를 사는 브랜드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3. SHUFFLE
= 올해 패션 신은 그 어느 때보다 디자이너 변화가 많았다. 일단 1986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해온 드리스 반 노튼이 38년의 여정을 마치고 2025 S/S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패션계와 작별을 고했다. 에디 슬리먼도 셀린느를, 킴 존스도 펜디를, 글렌 마틴스도 와이프로젝트를 떠났고, 지난 5년 동안 샤넬을 이끌어온 버지니 비아르 역시 30년간 몸담아온 샤넬과 이별할 예정이다. 피터 도는 2025 FW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헬무트 랭을 떠나며 필립 림은 자신의 브랜드 3.1 필립 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내려놓았다. 메종 마르지엘라를 떠나는 존 갈리아노의 다음 행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한편 더 자주 들리는 이름들도 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발렌티노의, 션 맥기르는 맥퀸의, 셰메나 카말리는 클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머지않아 하이더 아커만은 톰 포드, 사라 버튼은 지방시에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게 된다.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법. 새로운 디자이너는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다.



4. VERY DEMURE, VERY MINDFUL
= 한편에서는 거침없고 분방한 스타일이 트렌드를 점철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려 고상하고 우아한 패션이 각광받고 있다. 드뮤어, 올드머니, 조용한 럭셔리…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차분하고 정제된 룩이 다시 트렌드 한가운데로 올라왔다는 얘기다. 로로피아나·더로우·브루넬로 쿠치넬리 같은 일부 부유층 사이에서 소구되던 울트라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이런 경향의 선두에 서 있으며, 아티코·르메르·질 샌더·토즈·랄프 로렌 같은 브랜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절제된 아름다움을 설파하고 있다. 요란했던 패스트 패션이 가고, 우아하고 드뮤어한 패션이 다시 도래했다.



5. LIKE BRAT
= 올해는 펑크와 밴드 붐, 인디슬리즈의 자유분방함으로 노출에 관대해진 한 해였다. 소재는 점점 더 가볍고 시어해졌으며 실루엣은 과감해졌다. 그리고 여름, 이 자유분방함은 찰리 XCX로부터 시작된 ‘BRAT’ 정신과 맞물리며 그야말로 폭발했다. 불완전하고 삐뚤어진 모습으로 몸의 라인이나 특정 부위, 언더웨어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바케라는 프린팅과 디테일, 스타일링으로 란제리를 알뜰하게 활용했으며, 셀린느 옴므, 돌체앤가바나, 미우미우는 라운지 웨어와 일상복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다. 보일 듯 말 듯 끈으로 동여맨 루도빅 드 생 세르넹의 레더 쇼츠와 바스트 포인트만 겨우 가리는 톱, 얌전한 고프코어처럼 보이지만 발칙함을 숨기고 있는 올리 샤인더의 옷도 브랫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쿨하게 입고 싶다면 섹시해질 필요가 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이 시대가 원하는 패션은 그런 거다.



6. WORKWEAR FOREVER
= 작년 프라다가 선보였던 워크 재킷이 히트를 친 후, 워크웨어를 기반으로 한 스트리트 패션의 유행이 올해 정점을 찍었다. 팀버랜드와 협업한 루이 비통의 6인치 부츠는 공개와 동시에 많은 이의 마음을 빼앗았다. 루이 비통의 색은 과감히 덜고 팀버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살린 모습. 워크웨어의 상징이자 스트리트 패션의 근간을 이루는, 칼하트와 리바이스 같은 브랜드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해 전성기를 맞았다. 1980~1990년대 힙합 신에서 투팍 같은 유명 래퍼들이 선보인 이 패션은 그저 스타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워크웨어의 정수인 만큼 견고하며, 투박한 아름다움 안에 대체 불가한 레거시가 깃들어 있다. 이들의 오리지낼리티는 여전히 굳건하다.



7. SEOUL WAVE
= 올 한 해 서울은 그야말로 이벤트의 도시였다. 매일 새로운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관광객, 학생, 커플 무리가 줄지어 방문하는 성수동과 더현대의 파워는 이제 위대해 보일 정도다. 팔라스부터 032c, 르메르, 키스, 메종 마르지엘라, 셀린느…. 최근 서울에 터를 잡은 브랜드만 나열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왜 하필 서울일까? 032c 디렉터 요르그 코흐에게 도쿄도, 상하이도 아닌 서울에 아시아 첫 매장을 연 이유를 물으니 생각보다 간단명료한 답이 나왔다. 그 어느 곳보다 유행에 민감하고 패션을 열렬히 사랑하는 도시라서. 어반소피스티케이션, cfcl, 슈슈통, 뮈글러 등 팝업스토어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브랜드도 많다. 반대로 서울발 브랜드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다. 지용킴과 준태킴, 앤더슨벨, 포스트아카이브팩션, 엑슬림 등 한국 디자이너의 옷을 이제는 파리와 베를린, 도쿄와 상하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의 가능성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8. SECONDHANDS
= ‘요즘 쇼핑 어디서 하세요?’ 최근엔 누군가를 만나면 이 질문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세컨핸즈 플랫폼을 대답한 이들이 80% 정도. 언제부턴가 중고거래 플랫폼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대다수의 휴대폰엔 크림과 당근마켓, 번개장터 앱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후르츠패밀리에서 업계인을 만나는 일 또한 심심치 않게 많아졌다. 더 나아가 메루카리나 이베이, 그레일드를 디깅하는 빈티지 디거의 수도 늘었다. 이들을 중고거래로 이끈 건 단순히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싶은 욕구나 Y2K, 인디슬리즈, 긱 시크의 유행 탓만은 아니다. 전보다 옷을 사는 행위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안 어울리면 다시 팔아버리면 그만이고, 다른 옷이 입고 싶을 때는 안 입는 물건을 팔아 새 옷을 산다. 플랫폼을 통하면 누구든 판매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이런 순환의 고리는 판매자와 구매자, 플랫폼 그리고 환경까지 고려했을 때 모두에게 이득이다. 세컨핸즈 플랫폼의 영향력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9. MISMATCH
= 메가트렌드가 없는 지금의 트렌드를 대변하는 가장 현재적인 패션, 미스매치. 젠지들은 제멋대로 입는다. 이들이 추구하는 어글리 시크는 컬러와 실루엣에 대한 전통적인 기준이나 규칙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려 입는 행위에는 멋이 없으니까. 다리가 길어 보이려고 하이웨이스트를 입는다든지, 눈에 거슬리지 않는 편안한 색 조합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쿨하다고 느껴지는 건, 쉽게 말해 ‘아무렇게나 주워 입고 나온’ 것 같은 차림새다. 미스매치를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힘을 빼고 생각을 덜면 된다. 이를테면 각 잡힌 블레이저에 레이스 톱과 바이커 쇼츠를, 와이드한 스웨트 팬츠에 앞코가 뾰족한 에나멜 로퍼를, 체크 패턴 점퍼에 레오퍼드 패턴 팬츠를 매치하는 식으로. 처음에는 ‘이게 맞아?’ 싶겠지만 많이, 자주 입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다. 이게 미스매치인지, 아니면 그저 미스인지.



10. SMALL BUT BIG
= 어떤 면에서 SNS는 공평하다. 그곳에선 누가 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저 사진 한 장이 재미있고 쿨하고 ‘진짜’ 같으면 된다. 인디펜던트 브랜드들에게 그런 SNS는 한 줄기 빛과 같다. 자신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낼 줄 아는, 진정성 있는 브랜드에는 더더욱. 태호서울의 권태호는 이를 가장 잘 활용했다. 궁금해지는 이미지와 행실로 본인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티셔츠를 팔기 시작했으며, 앨범을 발매하고, 에이전시를 설립했다. 불과 1년 사이에 말이다.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누구라도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명석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최근 디자이너 강정석은 유튜브를 통해 슈트 제작 과정을 공개했고, 에옹쓰는 피드를 일기장처럼 활용한다. 기발하고 엉뚱한 셀비지 프로젝트의 콘텐츠는 가히 업로드를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독보적이다. 몸집은 작지만 색채가 뚜렷하고 단단하며 구경하는 것만으로 흥미로운 곳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패션 신에 청신호가 분명하다.



11. MODERN GENDER
= 트로이 시반이 쏘아 올린 ‘러쉬’라는 공은 패션 신, 더 나아가 세상까지 바꿔놓았다. 그가 가진 젊음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은 퀴어 컬처를 메인 스트림의 반열에 올려두기 충분했다. 몸에 꼭 맞는 슬리브리스 톱과 링거 티, 한껏 내려 입은 팬츠에 트렁크를 매치한 트로이 시반의 스타일은 올해까지 뜨겁게 이어지며 수많은 이들의 여름을 책임졌다. 이에 질세라 브랜드들은 리본과 꽃 모티브, 셔링 디테일과 레이스 장식, 시스루와 원피스, 마이크로 쇼츠를 남성 컬렉션에 그 어느 때보다 뻔뻔하게 녹여냈다. 요즘의 패션 신에서 남자다움과 여성스러움 같은 기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젠더리스, 보더리스 같은 단어조차 고리타분하다. 팔로모, 로에베, 셀린느, 생 로랑의 컬렉션까지는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이제 길거리의 남자들도 팬츠 위에 스커트를 레이어드해 입고,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쇼츠를 입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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