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지난 뒤, 지금 여기 아픈 전태일이 아픈 전태일에게

반세기가 지난 뒤, 지금 여기 아픈 전태일이 아픈 전태일에게

프레시안 2024-11-25 17:23:38 신고

1970년 그리고 53년 뒤의 지금 여기

1970년 10월 6일 전태일은 삼동친목회 친구들과 함께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을 긋는 '전태일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조영래의 전태일평전에는 전태일이 분신을 결행하기 직전 한 달 동안 생의 마지막에 벌였던 실태조사와 노동청 진정, 언론 홍보활동, 기업주와의 투쟁 등이 자세하고도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업주의 방해를 피해 어렵게 어렵게 126명으로부터 받은 설문지를 토대로 전태일은 평화시장 2만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건강실태를 생생하게 고발합니다. 126명이란 숫자는 너무 적어 통계로서 의미가 없는 게 전혀 아닙니다. 2만여 명의 응답과 똑같다는 사실을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모두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126명 가운데 96명(77%)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병에 걸려 있었고, 102명(81%)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인 1970년 10월 7일,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신문이 석간이었습니다. 신문사 앞 커다란 게시판에 신문 초판이 붙으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신문을 읽었습니다. 신문은 길거리 여기저기에서 팔았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적이 마침내 일어난 것이다. 경향신문사 신문 게시판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새로 나온 석간신문 한 장을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달렸다. 인간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 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모두 얼싸안았다.(조영래, 전태일평전, 263쪽, 2007. 2차 개정판, 돌베개.)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실린 기사의 제목은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었습니다. 부제는 이랬습니다.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 「거의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근로조건 영점... 평화시장 피복공장」.

그때 신문 한 장은 20원.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신문 500부를 사서 노동자들에게 팔았습니다. 어린 시다들에게는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수고한다며 100원, 200원을 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1,000원을 선뜻 내밀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녁의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 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 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마침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조영래, 위의 책, 265쪽.)

그렇습니다. 침묵이 깨지고 드디어 인간 이하 노동자들의 불편한 언어가 어느날 저녁 세상 속 빽빽한 언어의 숲, 신문 한 면의 맨 위로 불쑥 고개를 디밀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러나 이런 축제 분위기는 곧 한때의 반짝 이슈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전태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벼락을 칠 준비를 합니다.

▲전태일 열사 54주기인 13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 기념관에 시민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다. ⓒ연합뉴스

여전히 나의 나인 '전태일들'은 아픕니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이후로 벌썬 반세기가 훌쩍 지났습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십 몇 위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병이 들었는데도 돈이 없어 치로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전태일은 아팠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부터의 지독한 가난에 상처받고 마음 속 깊은 아픔을 품고 산 청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이 늘 아픕니다. 삶이란 손톱 끝의 작은 상처부터 시작해서 늘 다치고 다시 회복하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아픔이 몸의 질병으로 바뀔지 기적 그 자체인 삶에 대한 각성과 자비심으로 승화될지는 그야말로 자신의 마음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이웃의 마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은 사람을 자비와 연민으로 이끕니다. 전태일의 분신은 그런 자비와 연민의 헌신이었습니다. 이웃과 세상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 예수와 붓다와 무함마드가 이루고자 했던 우애와 환대의 이웃공동체 실천이었습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어린 생명 곁으로 돌아가면서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굴린 덩이를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갔습니다. 그 이후 전태일이 '나의 나'라고 호명했던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 성직자, 심지어 경영자까지도 전태일의 삶을 살고자 스스로 전태일이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이 분출했고, 세상은 바뀐 듯 보였습니다.

실제로 세상은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불평등은 더 극한으로 치달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우애와 환대의 나눔 공동체, 이웃공동체는 갈갈이 찢기고 해체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후지옥과 극단의 불평등, 초지능의 등장까지 코 앞으로 다가온 21세기 지금 여기, 세상은 칸막이 골방에 갇혀 디저털 도파민에 중독된 '홀로'들의 천지로 변했습니다. 아픈 홀로가 아픈 홀로와 경쟁하고 불신하는 아수라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아픈 전태일이고 내 이웃이 아픈 전태일입니다

1986년 대만의 화련시에 병상 8백 개 규모로 자제종합병원이 문을 엽니다. 이 병원은 무료병원입니다.

대만의 자선단체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가 운영하는 자제병원은 부자건 극빈자건 생명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치료비는 무료입니다. 생활비까지 줍니다. 전세계 100여 개 국가에서 자선과 구호활동을 하고 있고, 1,500만 명이 넘는 신도들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구호활동을 벌입니다.

자제공덕회는 태풍이나 폭우로 집을 잃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교회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기독교인이건 무함마드 교인이건 모든 사람은 붓다이고 예수이고 무함마드입니다.

1966년 어느날 비구니 증엄 스님이 어느 병원에 신도의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리고 병원 바닥에 핏자국이 낭자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스님은 한 임산부가 난산으로 병원에 왔는데, 치료비와 보증금이 없다고 병원 밖으로 쫓겨났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증엄 스님은 비통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었고, 그 인연으로 무료 병원을 세우자는 서원을 세우게 됩니다.

자제공덕회는 1966년 증엄 스님을 비롯한 6명의 스님과 재가 신도 가정주부 30여 명의 발원으로 출발합니다.

증엄 스님은 맨 처음 노인 후원기금을 모을 때 모두에게 대나무 저금통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하루에 50전씩을 모으자고 제안합니다. 한 재가 신도가 하루에 50전보다 한 달에 15원씩 모으는 게 낫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증엄 스님이 답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매일입니다. 매일 50전을 저금하면 여러분은 한 달 내내 좋은 마음을 내게 되지만, 한 달에 한 번 15원을 내면 그저 한 번 좋은 생각을 낼 뿐이지요.

증엄 스님이 다름아닌 대만의 전태일입니다. 대만에도 도처에 아픈 전태일입니다. 증엄 스님은 마음의 아픔을 자비와 연민의 서원으로 바꾸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전태일이 굴리다 만 덩이

전태일은 깨달은 자, 자비행의 보살이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를 다녔던 22살의 젊은 청년이 노동자도 인간이라며 분신을 결행하기에 앞서 쓴 유서는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깊고도 잔잔하게 울립니다.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조영래, 위의 책)

전태일의 일기를 보면 그는 오랜 시간의 고뇌와 사색을 거듭합니다. 마침내 전태일은 '나, 자아'를 버리고 나의 나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모든 생명체가 연결된 하나임을 깨닫고 생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은 1963년 6월 11일 남베트남의 유명한 불교 지도자 틱꽝득(Thich Quang Duc) 스님이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분신을 감행한 그 소신공양(燒身供養)과 똑같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꽝득 스님의 분신에 대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인권오름󰡕 207호, 2010. 6. 13.)

틱낫한 스님의 말 그대로 전태일은 투쟁과 저항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자비행의 파장으로 공명하고 거대한 범종처럼 깊고 멀리 종소리를 울리고자 했습니다.

지금 여기 전태일들의 응답, 녹색병원 전태일의료센터

세상의 기적같은 사건은 대부분 늘 그것이 기적이었음을 뒤늦게서야 알게 됩니다. 22살의 무학에 가까운 어느 청년의 분신이 기적이었음을 우리는 분신 이후에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조영래가 전태일평전을 '도바리 치면서' 집필한 것이 기적이었음도 뒤늦게 알게 됩니다.

2023년 9월 20일 녹색병원이 '전태일의료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기금 모금을 시작한 것은 기적의 사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1970년의 '지금 여기'에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깊고 넓고 멀리 외친 전태일의 부름에 무려 53년이 지난 '지금 여기'의 수많은 전태일들이 응답하는 생생한 자비행의 사건입니다.

전태일의료센터의 누리집 첫화면에 들어가면 깜깜한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흰 점들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 점에 마우스를 갖다 대면 녹색의 사람 이름이 뜨고 누르면 녹색의 사연이 드러납니다. 그 점이 벌써 2024년 11월 25일 현재 7,161명, 138개 단체, 17억원이 넘었습니다.

그 점은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온전하게 이 우주와 지구별 생태계에 통합된 소우주 그 자체입니다. 지구별 생명체는 모두 서로 함께 연결되어 존재하는 '하나'입니다. 홀로란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개념일 뿐입니다.

'홀로'의 감옥 속 삶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아주 쉽고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멈추면 됩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질주를 멈추고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백팔십도 다른 삶과 세상이 펼쳐집니다. 거기에는 돈과 권력과 성공 대신 이웃들이 있습니다.

깜깜한 핵개인의 원룸 쳇바퀴 문을 열고 광장으로 나와 별을 보면 다름아닌 내가 별입니다. 나 자신이 기적같은 지금 여기 지구별 생명체의 드넓은 녹색 세상 속의 전태일입니다.

그 숲에서 깊은 숨을 들이마셔야 우리 안의 깨어남이 일어납니다. 나의 나인 전태일의 자비행이 다가옵니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자비와 연민으로 불타는 우리의 마음과 세상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웹진 나비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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