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을 읽은 것은 내가 사회 초년생이었을 무렵이다. 이 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밝아지기 전에〉와 〈파란 돌〉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간 사람을 조금 늦게 따라가는 사람, 그러니까 후배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이고, 먼저 간 사람의 등을 바라보며 그 사람이 너무 좋고 너무 좋아서 울고 싶어지는 마음이 잔뜩 담긴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먼저 걸어간 사람들 포함하여,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까지, 한강의 사람들은 약하면서 강하고, 고통의 와중에도 환희를 알아보며, 가장 중요한 말을 건네지 못하고 사는 내내 혼자만의 심장에 간직하는 부류다. 그래서 한 사람이 떠나면 그것을 가장 오래 기억하는 이, 그것이 한강의 사람이다.
〈밝아지기 전에〉의 ‘나’는 십여 년 전 직장에서 만난 ‘은희 언니’의 행적을 좇는다. 그가 회사에 다닐 때 좋아하던 근무 환경, 산책 반경부터 동생의 죽음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오래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그리고 언제나 그를 그리워하고 기다린다. “그녀가 무심히 웃거나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문득 그 출근길 지하도 계단을 뒤따라 오르던 스물네 살의 직장 초년병으로 돌아가 있곤 했다. 예민한 걸음걸이가 깨어질까 봐 소리쳐 부르지 않았던, 그녀가 지닌 귀한 무엇인가가 나에게도 똑같이 귀하다고 느꼈던 그 깨끗한 시절로.”(〈밝아지기 전에〉) 은희 언니의 뒷모습에 대해 쓴 부분은 내가 이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읽으면 나도 가끔 은희 언니가 되고, 혹은 내게 은희 언니 같은 사람들을 무수히 불러오게 된다.
〈밝아지기 전에〉에는 나와 네가, 나도 너도 아닌 누군가가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가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밝아지기 전에〉) 그 마음은 주인공인 ‘나’에게 후회의 말들로 남지만, 그것을 마주하는 독자에게는 간절하고 열렬한 보호의 말들로 느껴지는 것이 더 애틋하다. 어디론가 틔워지지 못한 말은 우연의 행로로,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들에 틔워져 상관없는 사람을 살게 한다. 한강의 문장은 그렇다.
한강의 소설에는 깊은 사랑이 있다. 깊이 아픈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부서질 것 같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있다. 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사랑,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의 깊은 곳에 혼자 웅크린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그린 한강의 소설을 읽고 나면 그런 곳에 사랑을 놔두면, 피고 지며 살게 두면 너무 슬프지 않나요? 라고 묻고 싶어지는데, 아마 작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파란 돌〉)
〈파란 돌〉의 주인공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친구의 삼촌, 그리고 나에게 그림을, 여름 햇빛을, 나무 그늘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나’는 그와 열일곱에 만났고, 지금은 ‘내’가 그때 그의 나이가 되었다. 서른일곱. 어떤 사람들의 눈에 그 남자는, 그 관계는, 이상하고 꺼려질지 모른다. 피하고 조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강의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정말이지 중요하지가 않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선연하고 선명하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린 나는 얼마간 그를 보러 가지 않는다. 한 달 후 다시 그를 보러 갔을 때 그가 내게 건넨 말은 이런 것이다. “어디가, 아팠니?”(〈파란 돌〉) 그 낮고 조심스러웠을 물음은 사랑의 확인 같은 것. 한강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아프지 않으면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한강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무척 연약하게 만들어졌지만, 그래서 어떠한 손가락 하나에도 부서지고 찢어지기 쉽지만,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쉽게 사라질 것 같지만 쉽게 죽지 않는 이들이다. 〈파란 돌〉의 그는 말한다. “개울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맑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구.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정말 예뻤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걸.”(〈파란 돌〉)
한강의 사람들은 밤의 나무처럼 묵묵하고, 고요하고 환하다. 언제나 그렇게 되살아난다. 올가을이 기쁨으로 무척 소란하기 전에도, 한강의 사람들은 거기에 의연하고 환하게 서 있었다. ‐ 김화진(소설가)
아직은 살아서 어디든 - 한강 선생님께 드리는 서신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10월의 그 밤, 저는 합정의 한 서점에서 글을 쓰는 동료들과 북토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모두 한 마음으로 환호하고 기뻐했어요. 그 밤은 그렇게 열에 들뜬 채 동료들과 선생님과 우리의 소설과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죠. 집으로 돌아와 선생님의 소설이 꽂혀 있는 책장을 훑어보았어요. «검은 사슴»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그중 유독 눈에 띄었던 건 «노랑무늬영원»이었습니다.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노랑무늬영원»의 단본은 2014년 2월에 재쇄된 것입니다. 십년이 지나는 동안 햇빛과 바람에 책등이 바래고 덧표지도 사라졌지만, 이 작품집을 처음 펼쳤던 그해 겨울은 선명합니다.
그 겨울은 제게 참 혹독했습니다. 살이 에일 만큼 한기가 심했던 늦겨울이기도 했지만, 연달아 두 해 수험에서 낙방하고 좌절에 젖어 있었을 때였거든요.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십분 거리에 있는 군립도서관이 무력감에서 잠시 놓여날 수 있던 유일한 도피처였습니다. «노랑무늬영원»도 그곳에서 처음 읽었어요.
자료실 한편에 있는 긴 탁자에 앉아 〈파란 돌〉을 필사하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물처럼 투명하고 윤슬처럼 눈부신 문장들을 노트에 옮기는 동안은 입시를 준비했던 긴 시간 동안 소실되었던 부드러운 감정이, 삶에 대한 의지가 되살아나는 듯했어요. 서간체로 쓰인 그 소설이 쓰기에 관한 의지가 바닥난 제게 부쳐진 다정하고도 강인한 편지 같았거든요. 소설을 눈으로 짚고 손으로 적어나가다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물결이 넘실대며 상심은 옅어지고, 불안은 먼 곳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작품 속 ‘나’처럼 운동장을 달려보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안 쉬고 일곱 번을 달리는’ 것은 좀처럼 불가했지만, 차가운 숨이 허파를 간질이고 몸에 훈기가 돌고, 먹빛 하늘이 푸른빛을 띠며 형태가 뭉개져 있던 나무와 퍼걸러가 제 윤곽을 드러낼 때면 조금 더 꿋꿋이 살아가도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렇게 저도 점차 치유되어 갔던 것 같습니다. 작품 속 ‘나’처럼요.
이듬해 봄 저는 선생님이 재직하고 계신 예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77번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던 선생님을 먼발치서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검은 모직코트를 입은 채 입김을 불며 서 계셨던 모습, 그리고 석양이 지던 하늘, 기분 좋은 긴장을 누리며 홀로 들떴던 것 역시 기억나요.
휴학하기 전 들었던 선생님의 창작 수업도 떠오릅니다. 쓰고 싶어지는 힘을 갖게 하는 작품은 흔치 않다던, 그것이 읽기의 경이로움이라던 선생님의 그 나긋한 목소리도 선연합니다.
«노랑무늬영원»을 읽다 보면 화자와 선생님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테면 먼 곳에 있는 언니에게 다정히 안부를 묻는 〈밝아지기 전에〉의 ‘나’나 (성별은 다르지만) 동경하는 상대의 목소리를 유리잔 표면에 맺힌 자잘한 물방울로 표현하는 〈에우로파〉의 ‘나’ 역시 그래요. 이탤릭체로 기울어진, 전하지 못한 독백 같기도, 담백한 시 같기도, 잔잔히 흥얼대는 노래 같기도 한 대화문을 읽어나가다 보면 선생님이 들립니다. 작품 속에서 누군가가 들리고 떠오른다는 건 참 귀중한 일인 것 같아요.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선생님이 말한 읽기의 경이로움도 그와 맞닿아 있겠죠.
언젠가 수업에서 선생님이 회복하는 삶에 관해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어요. 참사의 슬픔이 여전히 안산에 고여 있던 4월이었고, 저를 포함한 많은 동기들이 쓸 힘을 잃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애도로, 누군가는 침묵과 회피로 일관하던 그때, 연한 살을 어루만지듯 서로의 상처를 조심스레 들여다보고 만져나갈 때야 우리는 비로소 계속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고 선생님은 말씀해주셨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내는 일이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회복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요.
어쩌다 보니 저 역시 계속 살아가고 있고, 또 쓰고 있습니다. 작품을 한 편 한 편 써나가고 있지만 상처를 직시하고 결핍과 한계를 마주하는 동안에는 쓴다는 것이, 혹은 산다는 게 버겁다는 생각도 듭니다. 삶에 따르는 수많은 고충과 불안을 체감할 때마다 그렇게 느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생하게 살아 무더운 공기를 가르는’, ‘펄펄 살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랑무늬영원» 속 무수한 ‘나’처럼요. 이들이 모두 회복하는 인간이라는 게 다행스럽습니다. 아직은 살아서 어디든 가고, 꿈꾸고 사랑할 이들의 이후를 상상하다 보면 인간의 여리고 무른 마음을 무참히 헤집지 않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되어요.
지난겨울 백열 번째 304낭독회에서 저는 선생님의 〈파란 돌〉을 낭독했습니다. 동지 무렵이었고, 두꺼운 코트를 입었는데도 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참 매서웠습니다. 제 차례를 기다리며 처음 이 소설을 읽었던 해를 떠올렸어요. 참사가 있던 그 해를요. 때문에 낭독을 하는 동안 목이 몇 번이나 잠겼고, 잠시 텀을 갖기도 했습니다. 머뭇거림과 비애의 순간이 꽤나 길었는데도 모두들 기다려주었고 함께 견뎌주던 게 기억납니다. 그곳에 모인 이들도, 같은 기억을 가진 이들도 서서히 회복하고 굳건히 살아낼 거라 믿으며 저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읽었어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회복의 시간은 누군가에겐 상대적으로 길고, 삶에 의연하기보다는 근심과 상실에 동요하며 사는 이들도 많겠죠. 난폭하기도 날카롭기도 한 세계에서 우리의 글이 상처보다는 치유가 되길, 둥근 접속과 연결로 이어지길 염원합니다. 글이 가지는 힘은 그것이라 여기고, 선생님의 글에서 늘 그 힘을 얻어요. 조금씩 단단해져감을요.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처럼 저 역시 계속 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소설 안팎의 굴곡과 경이, 희와 비를 온전히 누리고 받아들이면서요. 살아 어디든 누비고 울고 웃으며 그렇게, 함께요. ‐ 성해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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