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핀 연꽃이라 ‘목련’이라 부르는구나.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너며 읽은 〈아기 부처〉의 한 구절을 보고 나는 경탄했는데, 그렇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이미 이름에서 그 자신이 무엇인지 전부 보여주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일축해 ‘풍경’이라 불러왔던 것에 지극한 시선을 주면서 그저 흘러가는 일상을 갑작스레 특별하게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 내게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보통의 것에 경탄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한국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 가령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같은 소설이 주목을 받는 동안, 정작 내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내 여자의 열매〉였다. 나로서는 한강의 작품에 대한 첫 기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제목이 말해주듯 ‘나’가 ‘내 여자’라고 불리는 아내에 대해 서술하는 이야기다. 왜 ‘열매’라는 표현을 사용했느냐면 그 여자가 열매를 맺는 나무로 변해버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작품 세계에 ‘폭력’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듯, 제법 초기작에 속하는 이 작품 역시 폭력에 대해 응시한다. 다만, 폭력 가해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서술함에 따라 교묘하게 교감(혹은 이입)의 교착 상태를 빚어낸다.
남편인 ‘나’는 자신의 계획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게 착실히 살아왔다. 여자를 만나 아내로 맞고 도시의 아파트로 이사해 생활을 꾸리는 것은 그에게는 탄탄대로의 일상을 한 단계씩 밟아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아내는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도시의 소음, 허용 범위 안에서 잘 매만져진 조경은 아내를 숨막히게 할 뿐이다. ‘나’는 그런 아내를 설득해 베란다에 자그마한 화분들을 들여다놓는 대안을 충실히 수행하지만 아내가 갈구하는 자유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와의 생활 공간이 아내에게는 구속된 자유일 뿐이다.
그런 아내의 몸에 푸르스름한 멍이 점점 커져간다. ‘나’는 그런 사실을 전해오는 아내를 바라보며 그녀의 몸을 교접의 매개물로 상상한다. 그에게 멍들어가는 아내의 몸은, 성적 접촉과 사랑이 곧 비례하는 것이라 믿어온 그의 일상적 관념을 보여준다. 조금 이상하고 무섭지 않은가? 푸르스름해져가는 몸을 보고 아련한 과거의 애정 따위를 떠올린다는 것이. 자기 몸에 실금 같은 상처가 생겨 가느다란 피만 묻어나도 유난히 따끔거리는 게 우리가 보통 자신의 고통을 감각하는 방식인데, 어쩜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둔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남자는 지극히 자신이 고통을 감각하는 방식으로 남을 보고 있을 것이다. 폭력의 세계를 아주 일상적이고 보통의 것이라 감지하는 이 남자에게, 아내 몸의 멍 역시도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 풍경인 것이다. 폭력에 둔감한 남자를 보며 ‘일상적 폭력’에 이상스러운 느낌을 감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폭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절망케 한다. 일전에 나는 아주 가학적인 폭력, 즉 폭력의 세기에 비례하여 그 고통과 비참함이 커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에 자꾸만 의구심이 든다. 폭력은 무기력함, 응대하지 않음, 웃음, 웃지 않음, 슬픔, 분노, 순응, 통제 등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드러낸다. 일상을 마비시키는 폭력이라는 것은, 너무 일상화되어서 이런 폭력적 상황을 감내하고 여기에 순응하는 것이 더는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폭력에 둔감해진 감각들을 다시 날 세우게 한다는 점에서 사람이 나무가 되어버리는 소설은 우리에게 ‘일상’이란 과연 무엇인지 되묻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폭력적 현실에 도대체 어떻게 공감하는 걸까? 문학은 기본적으로 공감과 이입이라는 경험을 매개하는 예술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문학 작품 속 누군가가 되어봄으로써 인물과 비슷한 종류의 자기 고통을 매만져보기도 하고 연민이나 슬픔 따위의 교감을 활성화시킨다. 이런 행위는 작품 밖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에게 이입하는 연습을 통해 우리는 삶에서 만나는 타인에게 공감하고 그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정작 한강의 초기 소설에서부터 오랫동안 발견되는 어떠한 것은 ‘공감’ 그 자체이기보다 공감의 ‘실패’처럼 보인다.
〈아기 부처〉에는 어렸을 때 온몸에 화상을 입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듯이 철저히 설계된 삶의 노정 위에서 착실한 성공을 거두어온 아나운서 남편과, 그를 연민하는 마음으로 결혼했으나 화상 입은 그의 몸이 점차 혐오스러워졌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아내인 ‘나’가 등장한다. 이렇게 요약하면 남편이 그저 불쌍하고 아내가 못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남편은 한평생 자기 앞에 잘 닦여진 길을 밟아온 엘리트 아나운서로, 현재 자신을 숭배하는 여자와 외도 중이다. ‘나’는 그러한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사랑’이라는 것에는 동정과 연민 또한 뒤섞여 있으며 남편의 신경증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들에 익숙해져가며 점차 그의 몸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혐오감이 자신에게 또한 드리워져 있음을 ‘나’는 감내하려 한다. 그것이 그와의 관계에 충실하려 했던 그녀의 방식이다. 종내 애인에게 버림받는 남편은 폭력적 시선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것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남에게 뾰족한 폭력을 되돌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에게 새어나오고 뻗어져나가는 폭력성은 아내의 마음 한편에 스며들고, 아내는 결국 그러한 내외부의 폭력을 모두 감내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견뎌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내가 남편의 상처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그저 ‘실패’에 이르는 비관으로 맺음하는 것은 불충분한 결론이다. 폭력의 세계에 응대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공감의 실패를 받아들이는 일은 아닌가. 우리가 무언가를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말끔하게 공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우리가 무엇에 완전히 이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서로 다른 고통을 헤아리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선우은실(문학평론가)
1) 한강, 〈아기 부처〉(«내 여자의 열매», 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인용.
고백의 절차와 목록
1. 다수의 독자들이 한강의 글쓰기를 학술적이고 비평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와 관련하여, 세계 출판 시장에서 한국 문학 번역의 위상에 대해 등. 지적 담론을 투과한 다각적인 해석을 이해하면서도, 그러나, 내가 한강을 읽는 법은 지극히 사적인 차원에 속한다. 그리고 그럴 때 텍스트는 가장 풍부한 의미를 생성한다. 사적인 것은 공중에 함부로 내놓기 어려운데, 고백은 그것을 허용하는 관대한 발화 형식이다.
2. 나를 지배하는 감정: 극단적 수줍음. 수줍음은 자기를 내보이기를 부끄러워하는 것. 내보이기 부끄러움이 지나쳐 고백하기도 곤란하게 하는 것. 말하기의 어려움이 과도하여 더더욱 내보일 수 없는 것. 이중의 곤경.
3. 기억할 수 있는 한 아주 어릴 때부터 수줍어했다. 친족 어른들은 아무 장소에서든 활자가 인쇄된 것이라면 가만히 말없이 빠져들어 읽는 아이를 한껏 기특해했는데, 그들이 다정하게 말을 걸면, 소라게가 껍데기 속으로 머리를 움츠리고 모래에 숨듯, 더더욱 무언의 세계로 잠입했다.
4. 나중에 알게 된다. 말 없음과 말하지 않음에 함묵증이라는 병명이 있다는 것을. 나의 동류가 있다는 사실에 반가운 그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아니, 이것은 병이 아니야, 증상이 아니야,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검진 항목 몇 개에 예나 아니오로 표기해서 평가받을 만한 게 아니라고.
5. 대량으로 압도하는, 광범위한, 팽배한, 표준화하는, 판단하는, 왼쪽과 오른쪽, push and pull, 참과 거짓 하나만 요구하는, 이편과 저편 사이에 설치된 거칠고 뾰죽한 것들의 함정에 언제나 속아 추락한다.
6. 수줍음으로 인한 함묵은 가정 내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의 가벼운 놀림거리에 불과했지만, 사회에 나온 성인에게는 충분히 심각한 장애로 기능한다.
7. 말하기의 곤경에 수줍음 외에 단순한 부끄러움을 초과하는 쓰라린 수치심, 공포, 불안, 자기혐오, 처벌 의식 같은 나쁜 정념들이 달라붙는다. 그럴수록 더 말할 수 없다. 입과 손이 안으로 곱아든다. 곤경은 다중으로 진화한다.
8. 한강의 소설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만난다. 폭식과 거식의 반복, 알코올 중독, 학대하거나 차갑게 방임하는 부모, 비만, 다지증, 화상으로 졸아든 피부가 남모르게 몸통을 뒤덮고, 혈우병, 점진적 시력 상실, 농인, 말 더듬음, 함묵…. 이들의 곤경은 비밀스럽거나 그렇지 않기도, 현실적으로 결코 유일한 사례가 아니지만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홀로 고통받고 부끄러워하는데, 의학, 법, 사회적 인식 개선이 완벽한 해결책이 아닌, 타인의 이해와 사랑을 받을지라도 겪음 그 자체는 오로지 혼자 해내야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9. 곤경을 겪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나의 동류를 발견한다.
10. 곤경에 관한 글쓰기가 한 권, 또 한 권, 묵직하게 더해질 때마다 비밀의 공동체에 잠입하듯 탐독한다.
11. 이렇게 말해도 돼.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어.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 사랑하고 존경하는 작가들은 내게 언제든 거듭 확인시켜 주었다. 지극히 아름답고 정교한 문장에 외설적이고 저속한 어휘를 아무렇지도 않게 뒤섞으며, 가장 끔찍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유연하게 흐르는 문장들 위로 덧대고, 너무나 범속하고 하잘것없어서 이게 도대체 무슨 문학적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들을 그러모아 빛나는 귀한 돌을 알알이 박은 함 같은 이야기와 시를 만들기.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앤 카슨, 앨리 스미스, 그리고 한강.
12. 딱딱하게 안쪽으로 곱아들기를 멈추고 감히 용기를 내어 광막한 어둠의 바깥으로 촉수를 내밀기. 마치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삼촌의 작업처럼. 먹을 입힌 한지 위에 물을 한가득 머금은 종이죽 덩어리를 놓으면, 먹과 물이 종이의 펄프 결을 따라 미세한 흑백의 길을 내는데, 그것은 갓 배태된 동물에게서 분화할 모세혈관이기도 하고, 폭발하는 별이 내뿜는 빛이기도 하고, 화염이기도 한 것. 결국, 어떻게든 말하는 인간을 넘어, 말하는 인간이 아니어도 되는 것.
13. 수줍음을 완전히 떨치기 곤란하겠지만 부끄러워하지는 말 것. 굳은 혀를 녹이기 힘들다면 곱은 손가락을 펼 것. 그럴 수도 없다면 꿈틀거리며 세상에 온몸을 비빌 것. 내 곤경의 동류들이 발신하는 세계의 온갖 마찰음에 더듬이를 만들어 뻗을 것. ‐ 윤경희(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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