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정정하시다”
왕회장이 알츠하이머병(치매)으로 고생한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졌다. 그러자 그를 매일 보살폈던 간신규 사장이 서둘러 이를 반박했다.
"왕회장님은 현재 노인성 질병으로 다리가 불편하고 귀가 잘 안 들리는 정도다. 더 아팠다 덜 아팠다 한다. 서울아산병원에 입 원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기를 반복한다.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 5시 30분을 전후해 일어나신다. 가정부 2명이 차려 주는 아침식사를 잘 드신다. 지난해 초까지 거의 매일 6시 30분이면 휸다이그룹 본사에 들러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일주일에 한두번으로 줄였다. 보행이 불편하시기 때문이다. 이동할 때 측근의 부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보기 안 좋다고 외출을 줄인 것이다. 휸다이그룹 본사에 들 를 땐 먼저 이발소에서 세수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한때 청운동 자택에서 휸다이그룹 본사까지 아들들과 함께 새벽길을 걸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건강하신 편이다. 내가 알기 로는 요즘도 아드님들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신다. 그럼 정정하 신 것 아닌가.”
왕회장 비서실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왕회장님은 연로하신 것을 빼고는 지난해나 올해나 비슷하시다. 다만 아랫사람들이 보고할 때 도란도란 얘기하기보다 좀 큰 목소리로 해야 알아들으신다. 또 잠깐씩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왕자헌 회장 측의 한 인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했다.
“가족들이 미국으로 모시고 가서 치료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노인에게 흔히 나타나는 질병이었다. 그래서 아산병원에 계신 아내인 변중석 여사를 함께 모시고 가자고 했다. 자식 된 마지막 도리라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왕회장의 ‘미국 신병 치료설’은 왜 나왔을까?
휸다이그룹에서 면담록 기록을 담당했던 왕자헌 회장 측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왕회장님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김 위원장은 왕회장님과 왕자헌 회장 등을 만난 자리에서 건강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왕회장님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걱정을 많이 해줬다.”
면담록 기록자는 이때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행 치료’를 권했다고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미국 얘기를 꺼냈다. 실용주의 국가로 과학이 많이 발전했다고 미국을 예찬했다. 그는 일본을 더 낮 게 평가했다. 일본은 모방만 잘하고 철학과 근본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이 동경보다 더 낫다는 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미국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했다. 따라서 왕회장님도 미국에 가서 치료를 하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왕자헌 회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하시라’ 고 권했다. 왕자헌 회장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왕회장님이 건강을 되찾 아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 1993년 북한으로 보내진 비전향 장기수인 이인모 씨를 언급했다. ‘남한에서는 이인모가 북한에 오면 다 죽는다고 했다. 북한의 의술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무조건 살리라고 했다. 이인모는 몇 달 못산다고 했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나서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바로 미국 의사가 살렸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 말을 마치면서 또 한 번 강조했다. 그는 왕회장님을 미국으로 꼭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하라고 했다. 그런 뒤 그는 왕자헌 회장에게 두 가지를 주문했다. 다음번에는 왕회장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평양에 오시라고 했다. 또 한 가지는 왕자헌 회 장의 가족도 함께 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당시 북측에서는 김정일 위원장, 아시아태평양위원회 김용순 위원장, 송호경 부위원장 등 세 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휸다이그룹 측에서는 왕회장, 왕헌 회장, 이봉은 차장(비서) 세 명이 앉았다.
이봉은 차장의 말이다.
“평양에서 함흥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왕회장님의 건강을 김정일 위원장은 무척 걱정했다. 왕회장님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함흥에서도 어디론가 더 들어갔다. 북한의 도로라는 게 울퉁불퉁해 왕회장님은 더 피곤해 했다.김정일 위원장은 ‘이렇게 편찮으신 줄 알았으면 제가 가는 건데 그랬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지방을 순찰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며 몇 번을 사과했다. 북한도 유교적인 풍토가 있어서 그런지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와인 잔을 들고 큰 테이블을 한참이나 돌아 왕회장님 자리에서 따라주기도 했다. 그런 뒤 건배를 하자며 다시 또 큰 테이블을 돌아와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당시는 일상적인 남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남한이 수입소 를 먹는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다큐소설 왕자의난37]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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