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에서 구호품을 실은 차량에 대한 약탈이 이어지는 가운데 배후에 있는 폭력단을 이스라엘이 묵인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는 18일(이하 현지시간) 성명을 내 "11월16일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식량을 실어 나르던 109대의 유엔 합동 트럭 호송대가 폭력적으로 약탈 당했다. 대부분인 97대의 트럭을 잃었고 총구가 겨눠진 채 운전자들은 구호품을 하역하도록 강요받았다"고 밝혔다.
영국 BBC 방송은 목격자에 따르면 마스크를 쓴 괴한들이 호송대에 수류탄을 던지며 공격했고 이번 사건은 구호품 탈취 시도 중 가장 심각한 사건 중 하나였다고 전했다. 필립 라자리니 UNRWA 사무총장은 가자지구의 "시민 질서가 완전히 붕괴"해 구호 활동을 "운영하기 불가능한 환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남부를 잇는 케렘 샬롬 검문소에서 출발한 이 호송대는 이스라엘 통보로 예정보다 하루 일찍 출발하며 변을 당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루이스 워터리지 UNRWA 대변인은 호송대가 당초 17일 가자지구에 진입할 예정이었지만 이스라엘군이 하루 일찍 "익숙하지 않은 대체 경로를 통해" 30분 내 출발하라는 "짧은 통보"를 내렸다고 밝혔다. 새 경로의 안전성을 파악할 인터넷 등 통신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수송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UNRWA 쪽은 공격자의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구호품 부족으로 가자지구의 굶주림이 극에 달했고 치안 공백이 커지며 구호 차량 약탈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자지구를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공격으로 기능을 잃은 데다 올 초부터 이스라엘이 구호 트럭을 호위하던 가자지구 경찰 또한 하마스와 연계된 것으로 간주하고 표적으로 삼으며 혼란이 커졌다.
약탈은 올 초엔 굶주린 민간인에 의해 종종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폭력적인 조직 범죄로 변해가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구호 단체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유엔 당국자들도 가자지구 남부 유력 가문이 최근 몇 주간 일어난 약탈에 연루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이달 초 고위 구호 당국자가 "이는 자신이나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는 절박한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중무장을 하고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벌이는 순수한 조직 범죄"라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5월 주요 구호 통로였던 가자지구와 이집트 사이 라파 검문소를 이스라엘군이 점거하고 대부분의 물자가 케렘 샬롬 검문소를 통해 조직 폭력에 연루된 가자지구 남부 가문의 세력권인 가자지구 남부의 단 한 통로만을 통해 들어오게 되며 약탈이 더 쉬워졌다고 설명했다. 인도주의 단체들은 이스라엘 쪽에 다른 경로를 승인해 달라고 몇 달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묵살 당했고 지난달 들어서야 새 경로가 승인됐지만 이미 약탈자들은 새로운 경로에도 적응해 호송대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고 세계식량계획(WFP) 대변인 알리아 자키가 신문에 설명했다.
폭력단이 이스라엘군의 묵인 아래 활동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입수한 유엔 내부 문건에 따르면 문건은 지난달 폭력단이 이스라엘군으로부터 "적극적 시혜는 아니더라도 소극적 혜택" 혹은 "보호"를 받고 있다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해당 문건에 따르면 한 폭력단 지도자는 "이스라엘군의 제한, 통제, 순찰" 지역에 "군사 단지와 같은" 시설을 세웠다고 밝혔다.
가자지구 운송 업자들은 <워싱턴포스트>에 자신들의 트럭이 이스라엘군 기지에서 불과 450m 떨어진 곳에서 약탈 당했는데 이스라엘군은 그저 "그들을 보고 조용히 모든 걸 감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인도주의 단체 노르웨이난민위원회 사무총장 얀 에겔란트도 이달 인도주의적 호송대와 함께 가자지구를 방문하던 중 구호품을 싣는 지점에서 8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막대기를 든 남성 무리가 있는 것을 봤고 이후 여러 대의 트럭이 공격 당했다고 증언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가자지구 책임자 게오르기오스 페트로풀로스는 가자지구의 다른 지역에서 무기를 들고 있으면 하마스 전사로 의심돼 이스라엘군에 의해 즉시 제거되는 상황에서 "가자지구에서 무장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군 전차 150m 내로 들어와도 총을 맞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그곳(케렘 샬롬 검문소 인근)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냐"라고 이스라엘 당국자들에 따졌다고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이스라엘 쪽은 하마스가 구호품을 전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반복해 왔지만 <워싱턴포스트>는 한 미 당국자가 구호품 배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이러한 약탈 행위에 하마스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이 현장에 널리 공유되는 평가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로이터> 통신, <가디언>을 보면 하마스가 운영하는 가자지구 내무부 18일 구호품 약탈 혐의를 받고 있는 "폭력단"을 겨냥한 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폭력단원 2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약탈한 구호품이 암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멈출 근본적 해법은 결국 구호품 흐름을 정상화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가자지구에는 지난해 10월7일 전쟁 발발 전 하루 500대 규모 구호 트럭이 진입했지만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에 다르면 지난달 가자지구에 들어온 총 구호품 규모는 트럭 1160대 분량이다. 이달에도 9일까지 666대의 트럭만이 가자지구에 진입했다.
식량 불안을 평가하는 기구 통합식량안보단계분류(IPC)는 이달 8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가자지구의 인도적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으며 특히 북부에 기근이 임박했을 가능성이 높아 "몇 주가 아닌 며칠 내 즉각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UNRWA는 "이스라엘 당국이 주민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안전한 구호 전달을 촉진해야 할 국제법에 따른 의무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다"며 "이러한 책임은 트럭이 가자지구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주민들에게 필수 지원이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고 비판했다.
18일에도 이어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으로 적어도 20명이 숨졌다. 가자지구 보건 당국자를 인용한 <로이터>에 따르면 이 중 4명은 이스라엘이 인도주의 구역으로 지정한 지중해 연안 알마와시 지역 난민 천막에 대한 공습으로 숨졌다. 이 천막에서 숨진 이 중엔 어린이 2명이 포함돼 있다. 남부 라파의 임시 대피소에서도 피난민 2명이 공습으로 숨졌다. 의료진에 따르면 북부 베이트 라히야에서 주택이 미사일을 맞아 2명이 숨졌고 가자시티에서도 주택 공습으로 7명이 죽었다.
가자지구 보건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7일부터 이달 12일까지 이스라엘 공격으로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4만3665명이 숨지고 10만3076명이 다쳤다.
레바논에선 휴전 조짐이 보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폭격도 이어졌다. 17일 <로이터>는 레바논 최고위 당국자가 레바논 및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가 미국의 휴전 제안에 동의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이 회담에 대해 잘 아는 외교관이 여전히 세부 사항을 조율해야 해 최종 합의는 지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중심부 폭격은 이틀 연속 이어져 <로이터>는 레바논 보건부가 18일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를 5명으로 집계했다고 보도했다. 전날 5주 만에 이뤄진 이 지역에 대한 폭격으로 무함마드 아피프 헤즈볼라 대변인이 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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