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개의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것이 원자폭탄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군부는 원자폭탄인지 확실하지 않다며 정보부의 보고를 묵살했다. 이로써 항복은 지체되었고, 미국은 팻맨을 더 투하하기로 한다.
2번째 원폭 투하 작전의 제1 타겟은 고쿠라였고, 제2 목표가 나가사키였다. 기상관 측기 2대. 폭격기 3대, 예비기 1대 등 총 6대가 출격했다. 고쿠라와 나가사키 모두 아침 안개가 끼어 시계가 좋지 않다는 기상 보고가 들어왔 다. 그런데 고쿠라 인근에서 일본군 요격기가 출격한다는 통신을 감청하고 더 이상 고쿠라 상공에 머무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스위니 소령은 제2 목표인 나가사 키를 폭격하기로 하고 기수를 돌려 약 20분 후에 나가사키 상공에 도달했다. 그러나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고, 연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찰나 구름이 열리면서 나가사키가 선명하게 보였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두 번째 핵폭탄 팻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연이은 두 번의 핵폭탄 공격으로 일본은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결국 항복을 선언하였다.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지리적 약점으로 소련과 육로로 연결된 동북아시아가 공산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이 항복했을 때 소련은 만주의 관동군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38선 이북의 한반도를 8월에 재빠르게 점령했지만, 당시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에 있었으며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서울에 입성했다. 소련보다 한발 늦었다. 생체실험을 주도했던 이시이 시로와 요시무라 히사토 등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남아있던 실험 대상자들과 관련 시설을 모두 태워 증거를 없애고 실험 결과 문서만 가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교토대학 의학부는 731부대에 가담한 군의관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미국과 소련은 전범들에게 생체실험을 통해 나온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사면을 포함한 사법 거래를 하였고 더 이상 731부대가 이슈화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오키나와를 점령한 공로로 진급을 한 24군단의 하지 중장은 군단을 재정비하며 다음 작전을 준비하던 중에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한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 았다. 한국의 북쪽에는 소련군이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지만, 남쪽에서는 미군이 도착하질 않아 일본이 패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아베는 조선총독부와 산하 행정기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9월 9일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은 일본군의 호의를 받으며 서울로 입성한다. 곧이어 항복 조인식이 조선총독부에서 열렸다. 조인식에 앞서 잠깐 만난 하지 중장에게 아베 노부유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조선인들은 무지하고 악랄하고 야비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마냥 풀어 놓으면 장군님도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정치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하지 중장은 그 말에 속아 넘어가 ‘한국인들은 질서유 지를 위해 미군에게 절대 복종하라. 이를 어길 시에는 엄히 처벌하겠다’라는 포고문을 공포했다.
1948년
생체실험 프로젝트‘ZOO’
일본 의학계의 거물 중에 비밀리에 인간 생체실험을 진행하고, 연구 결과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생체실험 프로젝트‘ZOO’가 지금도 자행되고 있었다. 일본을 경악시킨 희대의 제국은행 살인 사건이 터졌다. 731부대의 관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론이 발표하였다. 적어도 당시 사용된 독극물이 731 부대로부터 흘러나온 것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다. 1948년 1월 26일 오후에 도쿄에 있는 제국은행에 하얀색 완장을 찬 방역반이 나타나 은행 직원들에게 말했다.
“가까운 곳에서 이질이 발견되어 여러분들은 예방을 위한 약을 먹어야 합니다.”
은행에 있었던 직원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남자가 건네는 약을 받아먹었다. 약을 먹 은 이들은 가슴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은행 안의 모든 사람이 중독되어 움직이지 못하자 남자는 유유히 은행 창구에 있었던 현금과 수표를 챙겨서 도망쳤다. 11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한 명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숨졌다.
경찰은 이 사건을 수 사하면서 과거에도 유사한 사건이 두 차례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건 초기에 경찰은 세균전 부대 관련자들에게 혐의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 가운데 수사팀은 그 당시 731부대 소속의 와타루에게 정보를 입수해 731부대 요원들 쪽으로 수사망을 좁혀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731부대 요원들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범인이 사용한 독극물에 대해 희생자들의 시체를 부검하거나 토사물 등에서 추출해 검사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물질인지는 끝내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건 당시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가 이 사건을 추적한 결과 731부대에서 아세트시아노히드린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청산가리가 인체에 들어 가면 즉시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아세트시아노히드린은 인체에 들어가도 약 1~2분 후에 효과가 나타나는 점, 피해자들이 죽어도 사체에서는 청산 화합물이란 것 외에는 밝혀낼 수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외압으로 731부대 관계자들을 수사하지 못하면 서 요미우리 신문도 더 이상 이 사건의 취재를 계속할 수가 없었지만, 사건 이후 30년이 지난 1985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가 공개되어 요미우리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사건의 범인 수법이 731부대의 독극물 취급 문서에 나온 것과 일치하고 범행 시 사용한 도구도 연구에서 사용한 도구와 일치하며, 1948년 3월에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이 연구소에 대한 취재를 강력하게 금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진범은 731부대에 근무했던 군인 출신으로 스미모토 중좌였다.
731 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한국에서 혈액을 팔아 많은 이윤을 남겼다. 이시이시로는 일본의 패망 후에도 미국의 묵인 아래 처벌 없 이 큰 부와 권력을 누렸다. 전후 미국은 동물 실험으로 얻을 수 없는 자료를 얻기 위해 731부대 출신 간부와 사법 거래를 하였다. 사법 거래로 살아남은 전범자들이 일본 의료계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그 당시 개발을 완료했던 생물학전 무기를 사용할 기회를 지금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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