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는 다양한 민족의 침입과 문화적 변화로 점철되어 있다. 브리튼 섬에 처음 정착한 켈트족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은 후대의 다양한 지배 세력 속에서도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켈트족은 문신과 나체 전사를 통해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독특한 전술을 구사하며 강인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또한 할로윈과 같은 문화적 유산을 통해 그들의 신화와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켈트족의 유산은 브리튼 섬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55년, 로마는 브리튼 섬을 침공하며 켈트족의 영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도로와 교역을 활성화하고 도시를 체계적으로 설계하면서 론디니움(현 런던)과 바스 같은 중요한 거점을 형성했다.
반면, 북부 지역은 로마의 관심에서 벗어나며 스코틀랜드와 같은 지역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의 침공은 브리튼 섬의 지리적 경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남부는 잉글랜드로, 북부는 스코틀랜드로 자리 잡았다.
5세기,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로마군이 철수하자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섬을 침공했다. 독일 북서부와 덴마크, 네덜란드 지역에 거주하던 앵글로색슨족은 식량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브리튼 섬에 정착하려 했다. 이들은 파괴적인 전술로 섬을 점령하며 켈트족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전락시켰다.
앵글로색슨족은 농경 문화를 정착시키고 새로운 계급 사회를 형성했으며, 그들의 언어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켈트족의 언어와 로마의 라틴어를 대체했다. 이 시기 잉글랜드(앵글랜드)라는 새로운 이름이 탄생하며, 오늘날 영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066년, 노르만디 공국의 공작 기욤(윌리엄 정복자)이 브리튼 섬을 침공하며 앵글로색슨 왕을 무너뜨렸다.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 윌리엄 1세가 된 그는 잉글랜드 전역에 군사 요새를 세우고 토지 조사를 통해 세금을 부과하며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노르만 통치 시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웨일스는 여러 소왕국으로 나뉘어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으며, 1283년 에드워드 1세의 정복 이후 잉글랜드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철저한 군사적 압박과 토지 분배 정책을 시행했다.
웨일스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브리튼 섬 통일의 야망을 품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강한 저항으로 응수했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윌리엄 월리스는 1297년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며 스코틀랜드 독립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월리스는 이후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처형당했으나, 그의 희생은 스코틀랜드의 반영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러한 저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루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결국 약 30년간의 전쟁 끝에 1328년, 잉글랜드는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브리튼 섬 내 무력 통일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이러한 독립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이후 영국의 정치적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브리튼 섬의 역사는 다양한 민족의 침입과 정복, 그리고 저항의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켈트족의 초기 정착과 로마의 통치, 앵글로색슨과 노르만의 정복,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독립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민족과 문화의 융합을 통해 현재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날 영국 사회의 다층적인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형성된 현재의 영국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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