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흰배슴새 2015년 7월 18일 아침, 로사빌(Rossaveel) 항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비바람은 그리 거세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아일랜드 서쪽 애런 제도(Aran Islands)의 이니시모어(Inishmore) 섬으로 갈 예정이었다. 하늘은 흐리고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배는 항해를 시작했다. 그날은 그해 여름 이니시모어 섬에 가장 많은 강수량이 기록된 날이었다. 점점 거세지는 파도에 배는 강하게 흔들렸고, 바깥 풍경은 점점 흐려졌다. 자연의 위력을 체감하며 나는 창밖의 소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를 본 건 그때였다. 꿈틀거리는 바다에 닿을 듯 말 듯 새가 날았다. 파도가 높게 일렁이면 새도 사라졌다. 바다에 빠진 걸까, 놀랄 틈도 없이 새는 민첩하게 파도 사이를 가로질렀다. 커다란 배도 뚫기 어려운 그날의 폭풍 한가운데에서 바람을 가르며 꿋꿋하게 나아가는 그 용감한 항해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가끔 헤쳐나가기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작은 새의 움직임을 떠올리곤 했다. 그날 영상으로 보아 큰흰배슴새로 추정된다. 7월은 그해 봄에 태어난 어린 새가 어미와 함께 겨울을 나기 위해 남대서양으로 떠나는 시기로, 멀게는 대서양 북쪽 끝의 그린란드부터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까지 해마다 이동한다. 인간을 뛰어넘는 작은 모험가. 물론 이런 모험가를 먼 타국 어딘가의 거친 바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도 조금만 자세히 보면 먼 곳에서 온 모험가와 그들이 가져온 경이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된장잠자리 3년 전, 서울식물원에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빗물이 모이도록 다른 곳보다 낮게 판 웅덩이를 조성하고 그곳에 잘 살 법한 식물을 심었다. 큰비가 내려 물이 가득 차면 개구리를 볼 수 있었는데, 그해 8월에 된장잠자리 유충 한 마리를 발견했다. 유충 시기가 다른 잠자리에 비해 짧은 된장잠자리는 이 작은 웅덩이에서도 충분히 살아갔다. 구수한 이름과 달리 철새처럼 먼 곳에서 한반도로 날아오는 비래종으로 매년 수천 킬로미터 이상을 날아와 한반도에서 알을 낳고 몇 세대를 거듭한다. 이들이 어떤 방식과 경로로 한반도까지 오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작은 벌레가 바다 건너 타국에 도달해 번성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나와 마주한 것이 그냥 신비로울 따름이다. 정원이 지구의 생명과 생명을 연결했다고 말해도 될까. 이 인상적인 모험가와의 만남은 작은 웅덩이 하나가 도시에 일으킬 수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지구에 사는 많은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모험을 자처해 왔다. 폭풍도 마다하지 않고,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거리를 쉬지 않고 이동한다. 강과 갯벌, 산과 들. 지구의 모든 표피가 이들을 차별 없이 반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곳곳에 자신만의 서식처(도시)를 짓기 시작한 이래로 지구의 모험가들이 내려앉을 곳은 급격히 줄었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한 여행을 계속해야 하는 모험가들은 도시의 조각나고 재단된 야생의 공간에 먼 곳의 비바람이 묻은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다.
흰죽지 3월 즈음,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 수면을 유심히 보면 좁쌀같이 흩뿌려진 새들을 볼 수 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한반도에 온 물새들이 유라시아 대륙 북쪽의 번식지로 떠나기 전에 모인 것이다. 흰죽지, 댕기흰죽지, 고방오리, 알락오리···. 곧 먼 길을 떠날 모험가들로 가득한 이 시기의 한강은 어쩐지 여행의 설렘과 두려움으로 넘실대는 듯하다. 시민 모임 ‘서울의새’는 5년째 한강에 모이는 물새들을 관찰하고 있다. 나 역시 모임의 일원으로서 몇 년 전부터 동참했다. 3월의 한강은 매우 춥다. 특히 강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양말을 겹쳐 신고 핫 팩까지 붙여도 발이 시리고, 쌍안경과 필드스코프를 든 손도 얼어붙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한강에 나와 무거운 장비를 들고 물새를 관찰한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이 특별한 여행자들을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한강에 모여 무엇을 하는지, 왜 이곳에 왔는지, 먹을 것은 있는지. 혹은 겨울을 보낼 작은 새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 또는 그저 사랑하는 마음. 올겨울에도 새들은 한강에 모일 것이다. 그러나 한강의 물새들은 늘 위태롭다. 철새 도래 기간에도 계속되는 수상 레포츠와 한강으로 밀려드는 무수한 쓰레기는 물새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많은 요소 중 몇 가지일 뿐이다. 해가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과 끊임없는 개발 공사는 모험가들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두려움으로 이끈다. 한강을 다시 찾은 이 작은 모험가들을 만나면 안부를 전해보자. 고생 많았어, 앞으로 먼 길 가는 동안 무사하길 바라. 아직 한반도의 하늘을 배회하는 된장잠자리와 저 멀리 대서양 어딘가의 바다에서 파도를 가르고 있을 큰흰배슴새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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