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불가' 기존 입장 바꿔…두테르테 "내일이라도 조사해라"
(하노이=연합뉴스) 박진형 특파원 = 필리핀 정부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은 '마약과의 전쟁'과 관련해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2016∼2022년 재임)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 수사에 협조할 수 있다는 뜻을 나타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과 두테르테 전 대통령 사이가 크게 악화한 가운데 마르코스 행정부가 기존의 '조사 불가' 방침을 바꾸면서 ICC의 두테르테 전 대통령 조사가 현실화할지 주목된다.
14일(현지시간) AP·로이터·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루커스 버사민 필리핀 행정장관은 전날 성명을 내고 ICC가 두테르테 전 대통령과 관련해 인터폴에 조회해 적색수배(국제체포수배)를 필리핀 당국에 보내면 "정부는 적색수배를 존중해야 할 요청으로 간주할 의무가 있다고 느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경우 국내 법 집행 기관은 확립된 규약에 따라 인터폴에 전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버사민 장관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ICC에 자수하기를 원한다면 "정부는 이에 반대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ICC의 두테르테 전 대통령 조사를 거부하겠다는 마르코스 행정부의 그간 입장과 크게 다른 것이다.
앞서 이날 의회의 마약과의 전쟁 조사위원회에 출석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나는 숨길 것이 없다. 내가 한 행동은 내 나라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면서 "변명이나 사과는 하지 않겠다. 내가 지옥에 가야 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올해 79세인 그는 "나는 이미 늙었고 곧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ICC는 전혀 무섭지 않다. 그들은 여기 언제든지 올 수 있다. ICC에 서둘러서 여기 와서 내일 조사를 시작하라고 요청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자신이 ICC 조사관을 직접 마주 대하면 발로 걷어차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달 말 의회에서 마약 용의자 사살을 위한 암살단이 있었다면서 "내 명령에 따른 경찰 행동에 대해서는 내가 전적으로 법적, 도덕적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암살단의 존재를 인정한 이런 발언에 리사 혼티베로스 상원의원 등은 그가 ICC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압박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2016년 취임 직후부터 대대적인 마약 범죄 소탕 작전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마약 복용자나 판매자가 곧바로 투항하지 않으면 경찰이 총격을 가해 용의자 약 6천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필리핀 정부는 집계했다.
이에 비해 ICC 측은 사망자 수가 1만2천∼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와 관련해 ICC가 2018년 마약과의 전쟁 예비조사에 착수하자 필리핀은 ICC를 탈퇴했다.
이후 ICC가 정식 조사에 나서자 필리핀은 자체적으로 조사하겠다며 조사 유예를 신청하기도 했으나, ICC는 필리핀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며 조사 재개를 결정했다.
이에 2022년 대선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인 세라 두테르테 부통령과 러닝메이트를 이뤄 당선된 후임 마르코스 대통령은 ICC의 조사를 거부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혀 왔다.
하지만 최근 양측의 정치적 동맹이 깨진 가운데 두테르테 부통령이 마르코스 대통령을 겨냥해 탄핵 사유가 있다고 비난하는 등 두 가문의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j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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