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 최송목 CEO PI 전문가 = "참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자세한 거짓말은 편지로 보내겠습니다." 스탠퍼드대학교 영어창작과 케니스 필즈 교수의 『거짓말의 즐거움』에 나오는 얘기다. 거짓말의 일상화, 가식의 일상화를 빗대어 한 말이다. '거짓말은 나쁘다, 악이다'라는 담론을 넘어 이미 우리네 생활에서 뗄 수 없는 삶의 일부이고 생존과 성공의 유용한 전략 수단으로 사용돼왔다. 과거 삼국지 등 전쟁에서 어린애들을 동원해서 동요로 괴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거짓말을 활용한 속임수 전략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진화해 현대에 이르러서는 국회의원선거, 대통령선거전 등에서 SNS, 뉴스매체 등을 통해 각종 비방, 괴담이 거짓말과 뒤섞여 가짜가 진짜처럼 난무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대다. 거짓말은 이제 군사 외교와 전쟁의 전유물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영국의 사회학자 라크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피험자가 10분간 대화하는 동안 60% 이상이 최소한 한 번씩 거짓말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연인이나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도 3분의 1이나 절반이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거짓말, 가짜는 우리 일상에 가득하다. 범위를 좀 넓혀 보자. 우리가 매일 보는 드라마, 영화, 연극도 허구의 지어낸 가짜 이야기다.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만드는 상업적 가짜, '픽션'이다. '속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짜'와 '가상'은 맥을 같이 한다. '가상(假想)'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짜 상상'이다. 거짓말은 상상을 기반으로 출발한다. 각종 예술의 창작도 상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상상과 가짜는 예술과 거짓의 경계 지점에서 가끔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가령 어떤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라고 했을 때 이를 펙트만으로 본다면 '거짓말을 잘한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거짓말 가짜, 진실 진짜가 뒤섞인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개인은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선택하기도 힘들어졌다. 거짓말은 '필터링 실패'로 인한 무지와 결합해 증폭된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종신 석학교수 피터 버크는 그의 최근작 『무지의 역사』에서 정보화 시대에는 지식 못지않게 무지도 확산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과거 유럽에서는 금서 목록을 지정해 검열했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신문, 정치 풍자만화, 연극 등을 탄압했다. 지식을 숨기거나 허위 정보, 가짜 뉴스, 은폐를 통해 정보를 감춘다거나 재난 발생 시에도 정부가 정보를 숨긴 경우가 많다. 이때 무지는 불 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생각 없는' 정보로 확산된다. 정보의 증가에 따른 검증, 소화, 분류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1274년)는 거짓말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악의적 거짓말이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거짓말로 'Black Lie' 즉 중상모략이 대표적인 예다. 둘째는 이타적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거짓말로, 포로가 돼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동료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는 선의적 거짓말이다. 'White Lie'로 불리는 거짓말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하거나,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다. 예컨대 시골에서 올라온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푹 쉬시다가 가세요."라고 하는 말이나, 시어머니가 "나는 너를 항상 딸처럼 생각한단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포장된 말이다. 또 별로 예쁘지도 않은 이웃의 아기를 보고 "아유 예쁘기도 해라"라고 하는 것이나, 가짜 약을 진짜 약으로 믿게 해서 병을 낫게 하는 플라세보 효과도 맥락은 같다. 이처럼 거짓말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거짓말을 피하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활 속 거짓말은 생활의 효율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세르반테스가 말한 '정직이 최선의 방책'임을 굳게 믿거나, 거짓말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이 주는 실용은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의 사례를 보면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하철 노선도가 그것이다. 지하철 노선도는 현대 도시인들 실생활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효율적, 보편적인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가상지도, 완벽한 가짜 지도다.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이 쓴 영국 여행기인 '빌브라인슨, 발칙한 영국산책'을 보면, 지하철 노선도를 최초로 만든 헤리 벡(Harry Beck)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지하철 노선도는 실제 지상 위에 세워진 도시의 지리 지형과는 거의 무관하다. 실제 거리, 방향, 순서나 장애물, 산, 강 등은 무시하거나 생략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가공의 지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노선도에서 보고 있다. 몇 호선을 타고, 어디에서 환승해서, 몇 분 만에 가는지를 보다 쉽고 빠르게 아는 것만이 중요하다. 실제의 모습이나 정확한 정보보다는 생략과 왜곡이 있더라도 목적에 부합하는 지도가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서울 지하철 노선도도 2024년 초 40년 만에 바뀌었다. 1933년 헤리 벡이 영국 런던 지하철에 처음 적용했던 8 선형(Octolinear) 방식이다. 이를 통해 많은 노선과 환승역을 쉽게 인지할 수 있고, 노선 간 구분이 쉬운 색상 및 패턴의 적용으로 역 찾기 소요 시간이 최대 약 55%, 환승역 길 찾기 소요 시간은 최대 약 69% 단축했다. 이 경우 많이 왜곡될수록 우리에겐 더 편리하고 더 유용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아무도 '거짓' 지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생활 속 현실로 돌아와 필자의 개인 경험담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회사 사장으로 일할 때 일이다. "이 대리! 어제 득남했다면서... 축하해" "네 감사합니다"라며 이 대리를 축하하고, "김 부장! 요즈음 판매실적이 부진해. 좀 더 분발해 보게"라며 김 부장을 독려하고, "홍 팀장! 이런 걸 아이디어 기획이라고 가져온 겁니까?"라며 홍 팀장의 기획서를 질책하고, "덕분에 어제 골프 즐겁게 잘 쳤습니다. 다음번에는 제가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라면서 정중하게 감사 전화를 하는 등 출근하면 거의 동시다발로 감정이 삭제된 '생활연극'으로 분주해진다. 직원도 많고 지인들도 많다 보니 환한 표정으로 결혼식 축하하고 곧장 어두운 표정으로 문상 가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펼쳐 놓고 보니 우리네 삶 속에 이렇게나 많이 이렇게나 여러 가지로 거짓과 가상의 세계가 널려 있다니 놀라운 현실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전개 과정에서 우리는 슬픈 일, 기쁜 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 감정이입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상황에 맞는 예법과 표정으로 태도를 취할 뿐이다. 다만 얼굴은 하나지만 표정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뀐다. 나쁜 의도의 가식이나 연극이라기보다는 맞닥뜨려지는 상대나 목적에 따라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살면서 분하고 화나는 상황, 충동적 감정이 올라올 때 이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영업직이나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회사 사장의 경우가 그렇다. 이럴 때 같은 행동이라도 받아들이고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 '솔직하다', '교양 있다', '무례하다', '가식적이다', '인내심이 부족하다' 등 다양한 느낌과 반응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이때 사람들은 솔직함을 미덕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당한 선에서 자기 생각을 참고 숨기고, 속마음과는 달리 좋은 말과 태도로 적당히 포장해 주기를 원한다. 상처받기 싫어서다. 이와 관련하여 손자병법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쟁은 속이는 것이다.
능력이 있어도 없는 듯하고, 군대를 움직이려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며,
가까운 데를 노리면서 먼 데를 노리는 것처럼, 먼 데를 노리면서 가까운 데를 노리는 것처럼,
이익으로 유혹하고,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이익을 취하라."
필자가 처음 손자병법의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전쟁은 총칼의 힘으로 싸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속임수'가 전부인 것처럼 단언하다니, 통상의 사회적 통념이나 도덕적 개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진실과 속임수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일이 잦다. 그러다 보니 '진실인가, 거짓인가?' 또는 '옳은가 나쁜 것인가?'의 단순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엉켜있다.
이때 손자는 거침없이 '전쟁은 속임수다(병자궤도야) '라고 직설한다. 현대적 의미로 옮겨보면 '삶은 속임수다' 내지는 '경쟁은 속임수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는 이어 친절하게 방법까지 일러준다. '이익으로 유혹하고,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이익을 취하라'. 우리는 손자의 이 말을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덥석 받아들이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손사래 치며 거절하기도 힘들다. 우리네 삶은 늘 욕망과 유혹사이를 오가는 갈등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글 : 최송목,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 저자
npce@dailycnc.com
npce@dailycnc.com
Copyright ⓒ 소비자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