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 박사가 5일 제주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주 오름 지명 문제점과 개선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비교역사언어학적 방법에 따른 제주 지명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강희만기자
[한라일보]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큼 높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졌다는 '한라산'.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지명의 해석은 과연 옳은 것일까. 제주도의회 환경도시위원회와 한라일보가 5일 제주도의회 대회의실에서 공동 주최한 '제주 오름 지명 문제점과 개선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선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선 제주 지명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역사·언어학적인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강조됐다. 이날 토론회에선 제주특별자치도가 관리하는 '오름 현황'에도 잘못된 이름이 많다는 문제도 지적되며 지명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초 조사 등이 요구됐다.
l "한자 표기에 매달려 엉뚱하게 해석"
김찬수 박사(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는 '비교역사언어학적 방법에 따른 제주 지명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제주어 지명에 남아 있는 언어와 오늘날의 제주어는 상당히 다르다고 진단했다. 제주어가 오늘날까지 장기간에 걸쳐 변형을 거듭해 왔다면, 제주어 지명 언어는 고대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지명은 처음엔 한두 사람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 붙여지지만 점차 고정돼 잘 바뀌지 않는 속성"이 있어서다.
김 박사는 제주 지명에서 발견되는 오류가 크게 '차자표기법의 오해', '고대어를 현대어로 해석하는 데에서 오는 오류'에서 기인했다고 분석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제주 지명인 '한라산'(漢拏山)이라는 말도 약 530년 전인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라 '한라라고 하는 것은 운한(은하수)을 잡아당길 만큼 높다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역시 한자 표기에 매달려 엉뚱하게 해석한 결과라고 김 박사는 주장한다.
김 박사는 "한라(漢拏)라는 지명은 '성스러운'을 의미하는 숭배하는 산에 대한 경칭으로 트랜스 유라시아어(알타이어)권에 널리 퍼져 있는 말에서 기원했다"며 "명백히 음가자 표기"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라산의 별칭으로 언급되는 '두무악'의 고전 기록을 뒤쫓으며 "원래 한라산을 지시하는 지명은 '두무오름'임을 알 수 있었다. '두무'란 고대어로 '가장 높은'이라는 뜻"이라며 "별칭이 아니라 수많은 오름 중에 가장 높은 오름을 지시한다"고 분석했다.
김 박사는 제주 지명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선 '비교 연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주어라고 해서 제주도에서 발생한 언어가 아니다. 역사, 지리, 언어학적으로 친연관계에 있는 연구들과 비교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김 박사는 "제주 지명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선 비교역사언어학적 방법을 도입해야 할 것"이라며 "제주 지명 해석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가 필요하고, 제주어-트랜스 유라시아어(알타이어) 대조사전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l "고증 거치지 않은 오름 지명… 바르게 표기해야"
또 다른 주제발표에 나선 오창명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는 옛 사람들의 말에서 '오름'보다 쉬이 확인되는 '오롬'으로 쓰겠다고 전제하면서 오롬의 이름과 변천, 표기 변화 등을 설명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자료를 보면 오롬 이름은 크게 두 종류로 전하고 있다"는 게 오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하나는 제주 방언이나 고유어, 또는 그의 변음으로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 또는 한자차용표기로 쓰거나 한자식으로 쓴 것, 또 그것을 현재 한자음으로 읽는 것"이라며 "어느 것이 본디 이름이고 어느 것이 나중에 부르거나 붙인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별해 내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제주시 조천읍 선흘2리 '검은오롬'을 한 예로 들며 오롬 이름이 잘못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오 교수에 따르면 검은오롬은 18세기까지 '시련이오롬'이라 해 한자를 빌어 '是連岳'(시련악)이라고 하다 19세기부터는 '검은오롬·검은오름' 또는 '검은이오롬·검은이오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초반 조사 기록과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巨文岳(거문악)이라고 쓰였고, 1959년 지명 조사와 제정 때 소리대로 '거문악(巨文岳)'이 아닌 '거문오름'으로 지정 고시됐다. 이후 1960~1990년대 지형도까지 '거문오름'으로 표기되다 2000년대 초반에 소리대로 썼던 '거문오름' 대신에 '검은오름'이 공식 이름으로 지정 고시됐다. 하지만 현재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이름이 '거문오름'인 것에 대해 오 교수는 "이전 지형도에 표기한 것을 본디 오름 이름인 듯 등재해 버렸다"며 "이것을 한자로 빌어 쓸 때는 주로 巨文岳(거문악)으로 썼는데, 지금 세계자연유산의 한자 표기는 拒文岳(거문악)이다. 이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한다"고 했다.
오 교수는 이 사례처럼 오늘날 지형도에 표기되거나 제주특별자치도가 관리하고 있는 '오름 현황'에도 여러 오롬 이름이 잘못 알려지고 있다며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거쳐 확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오롬 이름에 대해선 전문가에 의한 기초 조사를 철저히 한 다음에 고증을 거쳐 제대로 된 지명위원회의 회의와 토론 등을 거쳐 바로잡아야 한다"며 "그런 뒤에 새로운 이름을 지정해 고시하고 지형도, 오름 지도 등에도 바르게 표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l "제주 오름 지명 관심 이어져야"
도의회 환경도시위 한동수 의원이 좌장을 맡아 진행된 토론에서도 오름 지명을 제대로 해석하고 잘못된 이름을 바로잡기 위한 조사, 연구 필요성에 힘이 실렸다. 박찬식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장은 지명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비교 연구'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그동안 제주도 언어 연구는 100년 동안의 몽골 지배시대 영향을 추적하는 중세 몽골어와의 비교에 집중됐다"며 제주와의 역사적 연관성을 고려해 다양한 언어로 연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홍기표 제주역사문화진흥원장은 조선 초기인 1481년 최초의 오름 소개 문헌에 등장하는 오름 명칭이 47개에서 해방 직후 또 다른 문헌에 152개까지 늘어난다는 점에 주목하며 오름의 바른 이름을 찾는 '정명'을 위해 "문헌에 소개돼 있는 오름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순자 제주학연구센터장은 "지명이라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이 부르기 위해 만든 말"이라면서 제주에 사는 사람들이 불렀던 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김 센터장은 "지명을 해석하는 데에도 민간 어원의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하다"며 '우리말 지명 찾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정희 (사)물영아리오름습지해설사 협회장은 현재 통용되는 오름 지명을 고치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불러왔고, 지명마다 스토리가 살아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 협회장은 "물영아리가 무슨 뜻인가 물어봤을 때 물이 있어서 신령스러운 오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며 "그런데 이런 지명을 (해석이 잘못 됐다고) 바꾼다면 그 스토리를 살릴 수 있는 오름이 몇이나 될까"라며 도민 공감대를 강조했다.
장봉길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장은 현재 368개라고 일컬어지는 오름 수에도 의문이 있다며 이를 명확하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영웅 제주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오름 지명에 대한 공론의 장이 계속됐으면 한다는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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