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Y AUTUMN #2 | 혼자만의 시간, 서울 탐닉

SHINY AUTUMN #2 | 혼자만의 시간, 서울 탐닉

마리끌레르 2024-11-05 18:30:13 신고

가을, 떠나야 한다. 한 해의 수심(愁心)은 비워내고, 반짝이는 풍경들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11월을 여는 저마다의 마음가짐으로,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훌쩍 떠나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랐다. 마음을 넉넉하게 채울 책과 영화, 술 그리고 음악과 함께. 다섯 곳의 여행지에서 우리의 가을이 보다 찬란한 빛으로 물들길 바라며.

혼자만의 시간, 서울 탐닉

내게 11월은 가을을 닫기보다 겨울을 여는 달에 가깝다. 새 겨울이 오면 추운 나라로 향해 내 안의 온기를 느끼면서 스스로를 살피는 일을 의식처럼 치러왔고, 이를 앞둔 늦가을은 그 의식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돌아보며 내 삶에 덧칠해진 색들을 걷어내고, 오직 나만을 새하얀 상태로 남겨놓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2024년도 지난 몇 년과 다름없이 일로 가득 차 있다. 올해만큼은 나답게 살아보겠다며 주말마다 서울 곳곳을 마음껏 누비려 했던 야심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핑계로 빈번이 꺾였다. 그 계획을 이제부터라도 실천하기 위해, 남은 가을날은 혼자 서울 여행을 하며 알차게 쓰고 싶다. 집과 회사, 스튜디오를 오가던 단출한 동선을 조금만 벗어나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번잡한 도시에서의 삶도 충분히 반짝일 수 있음을.

베지 스튜디오

최근 끼니를 여러 번 거르고 자극적인 배달 음식에 의존해 건강을 해친 기분이 든다. 잘 챙겨 먹는 게 나를 보살피는 방법 중 하나일 테니, 이번 서울 여행의 점심 식사는 지난여름 공덕동에 문을 연 ‘베지 스튜디오’에서 하고 싶다. 8가지 채소와 반숙 달걀, 통곡물로 지은 밥을 예쁘게 담은 ‘채소밥’을 내어주는 곳. 생채소 위주의 샐러드보다 온기가 느껴지는 한 그릇은 허약해진 몸을 각종 영양소로 채우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깻잎이나 두부 등을 갈아낸 주스까지 곁들여 더욱 풍요로운 한 끼를 만끽하려고 한다. 매달 새롭게 선정하는 ‘게스트 채소’를 활용한 요리와 내추럴 와인을 내어주는 목, 금요일 디너를 즐겨도 좋겠다.

add 서울 마포구 백범로 152 202동 1층 13호
instagram @vegestudio_seoul

여정

임태병 건축가의 작업 공간 일부를 누군가가 머물 수 있는 ‘중간 주거’ 형태로 만든 ‘여인숙’. 이곳의 2층에 1인 전용 스테이 ‘여정’이 자리한다. 침구와 좌식 책상, 다도 세트 등이 단출하게 놓인 공간은 내 작은 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광정을 통해 스며드는 햇빛을 제외하면 바깥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니 나만의 시간에 침잠하고 싶을 때 찾아가볼 만하다. 고요한 이곳에서 차를 내려 마시거나 아끼던 책을 읽고, 잠시 밖으로 나서 불광천을 따라 걸어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홀로 보내는 하룻밤의 여정이 외롭지만은 않을 듯하다.

add 서울 은평구 응암로21길 17 2층
instagram @yeojeong_202

사운드 프로바이더

‘대문자 I’로서 나만의 시간을 좋아하지만, 혼자 여행하다 보면 왠지 심심해지는 순간이 생길 것 같다. 이때 성수동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카페 겸 바 ‘사운드 프로바이더’를 찾아가려고 한다. ‘미니멀한 공간, 맥시멀한 사운드’를 지향하는 이곳은 계절과 장르 등을 주제로 한 플레이리스트를 주기적으로 선보인다. 커피나 술, 디저트만을 곁에 둔 채 음악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공간. 박찬욱이나 류이치 사카모토 등의 영화음악과 소설가가 사랑한 곡들을 들려주는 청음회, 뮤지션의 공연, DJ 파티 등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되니 여행을 마무리한 이후에도 자주 들르고 싶다.

add 서울 성동구 뚝섬로7길 6 2층
instagram @soundprovider.seongsu

최유리 콘서트 <우리의 언어>

마음이 헛헛할 땐 그 허기를 음악으로 달래는 편이다.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지는 가을이 오면 최유리의 음악을 자주 찾아 듣는다. 생각과 감정을 담백하게 담아낸 그의 가사와 음색은 나조차 알 수 없던 어떤 감정을 선명하게 비추며 다정한 기운을 전해주곤 한다. 마침 최유리의 첫 정규 앨범이 10월 28일에 나온다. 앨범명은 그가 데뷔 전에 만든 자작곡의 제목이기도 한 <746>. ‘최유리’라는 글자의 획수를 모아 지은 이름이라는 소식을 들으니 마치 손 글씨로 꾹꾹 눌러쓴 일기 같은 음악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긴다. 그 진솔한 노래를, 11월 9~10일에 열리는 그의 콘서트 <우리의 언어>에서 직접 들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임유영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

나는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나? 생각해보니 꽤 많다. 마감 후 귀가하는 내 가방엔 매번 맥주나 와인이 들어 있었고, 그것으로 모자랄 땐 친구들을 불러내 소주를 들이켜야 지난했던 한 달과 이별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임유영 시인의 새 책에 마음이 절로 이끌린다. 12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참여하는 ‘시의적절’ 시리즈의 열 번째 책으로, 임유영 시인이 한 달간 매일 쓴 글들을 10월이라는 테마 아래 엮었다. 시와 에세이부터 메모까지, 그가 자유로운 형태로 써내려간 글은 사진, 회화, 음악, 영화 등 예술 전반을 다룬다. 일상 가까이의 예술을 누리는 삶에 취하고 싶은 가을밤, 위스키 한 잔을 곁들이며 읽어보려고 한다. 음악은 임유영 시인이 직접 고른 곡들을 틀 생각이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그의 플레이리스트 제목은 이렇다. ‘술보다 좋은 게 있는 것도 같아.’

셀린 시아마 <톰보이>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내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고민하다 보면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순수에 가까웠던, 그렇기에 나다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톰보이>가 올가을 다시 한번 국내 관객을 만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10여 년 전 선보인 두 번째 장편이자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테디상을 수상한 이 작품의 주인공은 10세 소녀 ‘로레’. 파란색과 축구를 좋아하고,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로레는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로 살기 시작한다. 주변과 세상의 시선 속에서 ‘내가 원하는 나’이고자 하는 아이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스크린에 섬세하게 펼쳐진다.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고, 그 마음을 동력 삼아 다시 부단히 나아가게 해줄 것만 같은 영화다.

션 스컬리 개인전 <소울>

션 스컬리, ‘월 런던 그린’, 리넨에 유채, 172.7×157.5cm, 2024.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Salzburg·Seoul /
©Sean Scully PHOTO: Eva Herzog

“당신이 가진 것, 진정으로 소유한 것은 영혼뿐이다.” 아일랜드 출신 미술가 션 스컬리(Sean Scully)의 문장을 접하니 그의 개인전 <소울>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11월 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선과 블록 모티프를 기반으로 추상미술을 전개해온 작가가 풍경의 대기를 구리, 알루미늄, 리넨 위에 그려낸 회화를 소개한다. 불규칙하게 배열된 컬러, 과감한 붓질을 통해 햇볕이나 석양빛 등을 표현한 연작 ‘월 오브 라이트(Wall of Light)’, 수평선을 거듭 그려내며 완성한 연작 ‘랜드라인(Landline)’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장소’의 개념에 주목하며, 예술을 통해 자연에 한걸음 더 다가가고자 해온 작가가 영혼으로부터 탄생시킨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나의 내면도 충만하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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