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이 궁궐을 보는 게 처음이라 무척 설레어하세요.”
아주경제가 주최한 '청와대·5대 궁궐 트레킹'이 열린 19일 오전 10시경, 창덕궁의 중심인 인정전에 들어서자 학생처럼 백팩을 매고, 운동화를 신은 할머니들이 단연 눈에 띄었다. 할머니들을 인솔하는 박지원씨(30)는 “신당야학에서 왔다”며 할머니들의 나이가 모두 70세 이상이라고 말했다. 허리를 펴는 것도, 걸음을 옮기는 것도 조심스러워 보였지만, 이날만은 마치 소풍날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궁궐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창덕궁은 차가 쌩쌩 지나다니는 밖과 달리 붉은빛으로 물든 나무가 고즈넉한 느낌을 줬다. 가을볕은 피부가 탈 듯 뜨거웠지만, 살랑 바람으로 땀을 식힐 수 있었다. 궁궐 설명이 적힌 비석을 꼼꼼히 읽는 사람, 풍경을 찍는 사람 등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궁궐을 즐기고 있었다.
창덕궁을 방문한 박석곤씨(59)는 작년에 이어 트레킹 행사가 두 번째라고 말했다. “집은 대구인데 아내랑 같이 왔다”며 “지난해에 참가했었는데 기억이 좋고, 무료여서 올해도 기다렸다가 신청했다”고 말했다.
딸과 같이 온 장종남씨(57)는 “전각과 후원을 보러 왔어요. 가을이잖아요”라며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예쁜 것 같다”고 말했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어울리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후원의 다양한 연못, 정자, 수목 등이 잘 조화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궁궐 안은 땅을 밟는 경쾌한 발소리로 가득했다. 어제 잔뜩 내린 비로 흙길 중간중간 웅덩이가 보였다. 창덕궁 안쪽에 있는 창경궁은 한층 더 한산했다. 창경궁은 경복궁과 창덕궁보다 건물이 적고 규모도 아담하지만 걷기 좋은 춘당지가 자리잡고 있다.
아들과 함께 온 박양주씨(42)는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을 둘러봤고, 이제 덕수궁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얼마 전에 아들이 창덕궁에 관련된 과학 숙제를 한 적이 있다”며 “같이 돌아보면서 아들이 설명해 줬다”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어떤 설명을 해줬냐는 질문에 맹치현군(10)은 “창덕궁 인정전에 박석이라는 돌이 있는데, 박석이 풀이랑 빛을 골고루 분산시켜서 멀리서도 왕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해줘요”라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고궁 트레킹을 하며 새롭게 인연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다. 참가자 기념품인 분홍 모자를 나란히 쓴 채 걷던 두 여성은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온 최연숙씨(63)는 “제가 길을 잘 모르니까 분홍 모자랑 분홍 배낭만 따라다니다가 우연치 않게 만났어요. 색깔이 확 튀니까 길 잃어버리지 않고 너무 좋은 것 같아요.”라며 옆에 있던 이소정씨(64)를 소개했다. 서울에 사는 이 씨는 혼자 트레킹을 신청했는데, 같이 대화할 상대가 생겨 기쁘다고 말했다. 최 씨는 “내년에도 하면 또 참가할 것 같다”며 “계절을 바꿔서 봄 벚꽃 시즌에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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