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때 “국민들이 가장 저축 많이 했다”

노태우 정부 때 “국민들이 가장 저축 많이 했다”

평범한미디어 2024-09-25 02:51:2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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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이내훈의 아웃사이더] 31번째 기사입니다. 이내훈씨는 프리랜서 만화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주로 비양당 제3지대 정당에서 정치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민생당 소속으로 최고위원과 수석대변인을 맡고 있습니다. 이내훈의 아웃사이더는 텍스트 칼럼 또는 전화 인터뷰 기사로 진행됩니다.

 

[평범한미디어 이내훈 칼럼니스트] 정치인 노태우를 떠올려보면 가장 먼저 전두환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둘 다 신군부의 주역으로 군사 쿠데타를 지휘했다. 그런데 실제 정권 운영에서는 크게 달랐다.

 

국민들이 민주화의 열망으로 피 흘려가며 쟁취했던 대통령 직선제였던 만큼 이전처럼 공포 정치를 반복할 수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권위주의의 탈을 벗으려고 했다. 경제 정책에도 힘을 썼다. 해외 자본을 유입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종전까지 최악의 노동권 방치 수준에서 조금씩 제도화로 나아가기 위한 첫 발을 뗐다. 어느정도 경제적 선순환이 일어났다. 은행 예금율이 가장 높았던 때가 바로 노태우 정부 집권기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떠밀려서 개혁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KBS 캡처>

 

명분과 결과는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역사에서 증명되곤 한다. 노태우 정부가 표면적으로나마 권위주의를 탈피하려 한 이유를 짚어보고자 한다. 영화 <1987>에서 생생하게 목도한 현대사를 다시 나열해보려고 한다.

 

1985년 실시된 12대 총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다. 신한민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1000만 개헌 서명 운동을 벌이며 전두환 정부를 압박했다. 서슬퍼런 전두환 정부가 강력한 민주화 요구를 겨우 막고 있던 그 즈음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세 대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 이 사실을 동아일보가 일보로 타전하고 세상에 알려지자 전두환 정부의 공포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폭발하기 일보직전 상태가 됐다. 더구나 대통령 전두환은 자충수를 두고 마는데 현행 간선제 헌법을 고수하겠다(일명 4.13 호헌 조치)고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전국 곳곳에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터지듯 일어났다.

 

1987년 6월9일에는 전국 대학들에서 ‘6.10 규탄대회 총궐기를 위한 실천대회’가 열렸다. 연세대 학생들은 교문 밖을 나가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22세 이한열이 뒷머리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이한열이 목숨을 잃는 일련의 소식을 접한 대다수 국민들은 마침내 ‘민심 폭발’을 만들어냈다. 중고둥학생, 대학생, 회사원, 가정주부 가리지 않고 모두가 들고 일어났다. 누구나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6월26일에는 명실상부 전국 규모로 시위가 번졌다.

 

국민 분노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낀 집권여당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는 6월29일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 국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6.29 선언)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여야 합의 개헌을 추진했으며 10월27일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이때 완성된 헌법이 37년간 이어져오고 있는 현행 헌법이다. 개헌의 주요 내용은 첫째 대통령을 간접 선거가 아닌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는다. 둘째 국회의 위상을 정부보다 높이기 위해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되 국회의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해임의결권을 해임건의권으로 축소해서 대통령의 행정부 권한과의 균형을 맞춘다. 셋째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할 때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넷째 헌법재판소를 신설해 법률의 위헌 여부와 국가기관의 권한쟁의 등을 관장하도록 한다.

 

그렇게 개헌에 따른 대통령 선거는 1987년 12월16일에 치러졌는데 모두가 알 듯 ‘3김 분열’로 인해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36.6%를 얻어 어부지리 당선을 거머쥐었다. 신한민주당의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후보로 나섰으며, 김영삼이 28%, 김대중이 27.1%를 얻었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도 8.1%를 얻었다. 직선제 개헌 이후 국민으로부터 다수 득표를 얻어 정당성을 획득한 노태우 대통령은 어느정도 개혁 조치를 추진할 수밖에 없는 배경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은 이전의 권위주의 정부들과 달리 야당과 노동계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했는데 전국민 의료보험, 국민연금, 최저임금제 등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장애인 직업훈련원과 직업훈련대학이 설립됐고 여성직업훈련원도 신설되었다. 1990년에는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었고, 1991년에는 사내복지기금법으로 생활안정자금 대출과 장학지원 제도 등이 마련됐다. 주거 안정을 높이기 위해 소형 국민주택과 임대주택이 대폭 공급되었고, 전국적인 상수도 사업이 추진되어 물 공급율을 높였다. 나아가 과학기술 투자를 확대하고 사립대 재정 지원을 강화했다.

 

대북 문제에 대해선 적대성을 드러내기 보단 7.7 선언을 통해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공동체적 관계를 표명하고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개최, 문화 개방과 물자 교류를 인정했다. 제도적으로도 ‘남북 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 교류 협력 기금법’을 제정해 남북관계 개선을 뒷받침했다. 현재 한국 보수우파는 핵 개발을 완료한 북한에 대해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노태우 정부 당시에는 이전의 그 어떤 우파 정부보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편에 속한다. 1991년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전두환의 후임자였고 결국 임기 후 내란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대통령으로서는 민주화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복지와 교육, 경제와 과학 진흥에 적극적이었다. 고용시장도 안정적이었고 외벌이로도 가정을 부양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맞벌이가 국룰이고, 내 집 마련 자체가 꿈 같은 이야기가 되었고, 전세계 꼴등 출산율의 대한민국은 그러한 슬픈 자화상들로 채워졌다.

 

다음 아웃사이더 칼럼에서 다룰 주제는 ‘김영삼 정부의 빛과 그림자’다. 맛보기만 다뤄본다면 김영삼 정부 집권기에 빠질 수 없는 IMF 외환위기인데 1990년대 초중반까지 유지되던 평온함을 지나 아시아 금융위기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을 비롯 아시아 경제개발은 해외자본의 영향력에 좌지우지됐는데, 그럼에도 아시아 국가들은 외화 유동성에 대한 경험치가 없었다. 그저 끌려다녔다. 1990년대 초반 먼저 일본이 침체에 빠졌을 때 반면교사 삼아 제대로 대책을 세웠으면 좋았으련만 김영삼 정부는 그러지 못 했다. 물론 잘 한 것들도 많았다. 다음 시간에 하나하나 톺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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