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아이돌 지망생, 모델, 인플루언서…‘그런 여자애’의 투쟁기

[책 속 명문장] 아이돌 지망생, 모델, 인플루언서…‘그런 여자애’의 투쟁기

독서신문 2024-09-20 14:00:00 신고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미움을 받았다. 한번쯤 헤집어볼 만한, 이겨볼 만한 여자애였다. 남자들은 모두 내가 본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여자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면서도 나를 ‘신 포도’로 여겼다.  <21쪽>

그 시절은 내게 너무 큰 상처였는데. 남자애들에게도 여자애들에게도 진절머리가 났는데. 대체왜 나를 미워할까? (...) 왜 내 얘길 안 들어줄까?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 내가 크게 잘못된 걸까? <22쪽>

네 콘셉트는 ( )야. 실장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머리도 자르지 말고 입술엔 틴트만 발라. 살은 더 빼야겠고. 3킬로그램만 더 빼. 안면 윤곽이나 양악도 생각해보자. 덧니는 귀여우니까 내버려두고. 교복 치마도 줄였으면 다시 늘려. 앞머리 자르지 말고. 웃을 때 헤헤 하고 수줍고 해맑게 웃어. 아니 그 느낌 아니고. ‘헤헤’. 포인트가 있어. 거울 보고 연습해 와. 눈에 힘 좀 풀고 다니고. 야하게. 나른한 느낌 알지. 연구해 와. 너 나이 많은 편인 거 알지? 이게 네 마지막 기회야. 됐어. 가봐.  <30쪽>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여자 아이돌 몸매 사진과 그들에게 달린 악플을 보며 목표를 곱씹었다. 텅 빈 몸만이 나를 저 길로 이끌 수 있기에 매일 더 날카로워지는 턱선과 이목구비, 줄어드는 몸무게를 보며 고통을 달랬다. 몸무게 정체기가 찾아오면 입이 바싹 마를 때까지 침을 뱉었다. 1그램이라도 더 줄이고 싶었다. <33쪽>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나는 여자 곁에서 비로소 살아 있다고 느꼈다. 어떤 남자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자와 있을 때만 숨을 쉬는 것 같았고, 다른 때는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여태껏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정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내내 시달렸던 외로움은 살아 있음을 갈망하기에 찾아오는 공허였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그 외로움은 모조리 사라졌다. 만나는 사람이 연인으로는 최악이라고 해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인정한 것만으로도 오롯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08쪽>

스물두 살의 나는 여자들의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다. 당시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여성의 모습은 다소 납작해 보였다. 꿈이 많은 당찬 소녀의 모습 아니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 그것도 아니면 능숙하고 섹시한 요부의 모습이었다. <149쪽> 

물론 그런 모습의 여자들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아는 여자들은 좀 더 다채로웠다. 틈만 나면 울어재끼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화도 많고 저밖에 모르고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꼴불견이고 시끄럽고 말 많고 실수도 많이 하면서 땍땍거리고…. 나는 그 여자들을 사랑했다. <149쪽> 

『나는 거기 없음』
곽예인 지음 | 위고 펴냄 | 208쪽 | 17,000원 

[정리=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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