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 치열한 낙관②: 파리로부터에 이어
[문화매거진=MIA 작가] 어두운 미술관, 높은 곳에 걸린 조명에서 떨어지는 빛을 받은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나는 그 얼굴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바라볼 뿐인데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의 대상은 나 자신이기도, 그림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내가 그림을 바라보지만 그림 또한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보는 그림과 나를 끌어당기는 그림 사이에서 출발점을 잃어버렸다.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지만, 생명이 느껴지는 2차원 평면의 고요한 세계. 그림이 내게 주는 힘은 형체가 없으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분명히 느껴지는 것 이상으로 나를 장악하는 아우라였다. 그가 내게 약속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때부터 다른 무엇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갈등, 이별 그리고 결정들이. 내가 그림과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시하면 불러줘. 나도 문화생활 좀 하게.”라는 오래된 친구의 말은, 고맙고 친절한 것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다음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 그건 바로 ‘나와 비슷한 정도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더 이상 가까이 지낼 수는 없다는 결정이었다. 결심에 가까운 이런 결정이 맞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사람들과 붙어있으면 점점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혹은 해야 하는지 흐릿해지는 기분만은 선명하다는 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을 찾는 것보다 날 무력하게 만드는 의도 없는 순수함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다.
파리에서 미술관을 마음껏 다니며 자유로움에 취해 있을 때, 불현듯 이런 기억들이 떠오른 건 우연인 것 같지 않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면 주로 불편한 종류로 돌아왔던 반응들, 대개 무관심했던 얼굴들. ‘나는 그림 잘 몰라’로 시작하는 말은 우리의 대화가 그 이상 발전하기는 어렵다는 의미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의지까지 동시에 내포했다. 반대로 나를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인 마냥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불편했다. 그런 반응에 대비하고자 나는 나에 관해, 정확히는 ‘그림 그리는 일’에 관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피상적인 몇 가지 문장을 건지려 노력했고 지금은 익숙하게 그런 대화를 넘어가곤 한다.
익숙해졌지만, 그런데도 편안히 마음 둘 곳이 어디인지 느낄 수 있는 만큼의 갈망은 아직 있었나 보다. 나의 모든 게 자연스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장소를 발견한 걸 보면. 어디에나 그림이 걸려 있고, 걸어서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들라크루아 미술관 사이를 거뜬히 다닐 수 있는 나라. 여기서 태어나고 살았다면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타인에게 한국에서처럼 ‘그렇게까지’ 설명하거나 고민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이건 단순한 가정 이상이다. 지금껏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체력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파리에 대한 감정을 돌아보며, 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순수하지만은 않았다고 자신에게 솔직히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은 어떤 반작용으로 고개를 든 희망과 행복인데,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명확했다. 그동안 파리에 가고 싶은 소망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숱하게 얘기하였던가. 그때마다 등장했던 반대 항의 실체는 한국에서 겪은 부정적인 경험담과 비판이었다. 이번 여행은 내가 파리에 이렇게나 쉽게, 전적으로 마음을 줄 수 있었던 이유의 목록에서 ‘한국이 괴로워서’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실태를 인정하게 했다. 이 감정은 혐오가 아니다. 나의 욕구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동어 반복이지만 이 문제는 예술, 그림을 만나고부터 시작되었다고 느낀다.
자신의 무지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나를 배려하는 방식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었을 수도, 혹은 그 의도를 품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이 가능성을 계산하는 행위를 변명하자면, 한국에 대한 반감이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예술을 자연스럽게 여기지 못하게 만든 문화의 기질, 그래서 나를 변명하게 만들었던 기억을 미워한다. 겪을 필요 없었다고 생각하면,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커져만 간다.
루브르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본다. 머리가 하얀 어느 여행자가 찍어 준 사진으로, 유독 날이 맑고 피라미드 저편에서 비치는 햇살 때문에 더 현실감이 없어 보이는 풍경. 내 얼굴까지 낯설다. 사진 속 사람은 누구일까. 본 것, 느낀 것, 먹고 생각한 것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번 여행은 지금껏 날 결박하던 것들의 실체를 알려 주었다. 내가 속한 세상은 저열하며, 한낱 꿈같은 장소는 저편에 있을 뿐이다. 이 두 장소에 관한 갈등은 앞으로 작업을 통해 묻거나 쓰고 그려야 하는 것, 혹은 평생 만지며 살 무용성의 은유로 느껴지기도 한다. 깊이 빠져들수록 가치를 잃는 질문이 번질 뿐이다. 무엇일지, 이 사진은, 저기는, 거기 서 있는 나는, 그림과 예술을 바라는 나는, 이 마음을 둘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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