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문어 카르파치오
」베네치아에서 유명한 것들을 꼽다 보면 비엔날레, 곤돌라, 무라노 유리 등에 이어 ‘해리스 바(Harry’s Bar)’가 열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지정석이 있을 정도로 헤밍웨이가 사랑한 곳이자 칵테일 ‘벨리니’의 발원지. 카르파치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요리의 탄생은 언제나 유쾌한 사연과 함께한다. 1950년대 해리스 바의 단골인 한 백작 부인은 건강상의 문제로 더 이상 익힌 고기를 먹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는다. 바의 창립자는 생고기 처방을 받은 한 손님을 위해 신선한 소고기를 얇게 저며 치즈를 얹고 레몬즙을 뿌린 요리에 당대 화가의 이름을 붙여 시그너처 메뉴를 만들었다. 붉은색을 잘 쓰는 화가의 이름이 붙은 만큼 생고기의 신선함이 상징이었지만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며 재료에 해산물이 더해졌다. 특히 해산물과 레몬을 일반적인 식재료로 사용하는 시칠리아의 카르파치오는 산미가 풍성하다. 캐주얼 이탈리안 레스토랑 쎄니에의 카르파치오는 시칠리아 스타일을 따른다. 폴포 샐러드에 문어와 감자가 함께하듯, 삶은 문어에 감자로 직접 만든 마요네즈를 올리고 생 초리소로 짠맛을 살포시 얹는다. 적은 양의 재료들이 서로 만나 묵직함을 일구는 와중에 케이퍼와 레몬, 올리브유로 만든 소스가 맛이 선명하도록 돕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지만 어울리는 술로 프랑스 샤블리를 권한다. 영국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호주에서 이탈리아인들과 식당일을 하며 배운 최세윤 셰프의 개인적인 취향이다. 이탈리아 요리와 즐기던 ‘로제 드 쎄니에 샴페인’을 잊지 못해 가게 이름으로 붙여버린 패기를 믿을 수밖에.
세비체 클라시코
」세비체는 해산물을 썰어 라임즙에 절인 후 허브를 올린 페루의 대표 음식. 잉카문명 이전인 모체문명 때부터 시작되어 페루의 국토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녔다. 오랜 세월 변형을 거쳐 이제는 중남미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리마플러스는 수도권의 몇 안 되는 페루비안 레스토랑이다. 리마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운영되다 얼마 전 자리를 옮겨 와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리마플러스로 재단장했다. 이곳의 세비체는 이름 그대로 전통 세비체다. 집집마다 각자의 레시피가 있지만 ‘코어’는 북부 방식으로 통한다. 일명 ‘타이거 밀크’라고 불리는 ‘레체 데 티그레(leche de tigre)’. 한 줌의 소금과 너무 많다 싶을 정도의 라임, 흰살생선이나 생선 뼈, 셀러리와 생강, 마늘을 넣고 간 소스가 세비체의 핵심이다. 타이거 밀크에 절인 생선살과 안데스 옥수수, 고구마, 카사바 같은 구황작물을 더하면 완성. 뽀얀 생선살을 입에 넣으면 산미의 축복, 아니 세례가 내린다. 페루인들이 꼭 함께 마신다는 포도 브랜디인 ‘피스코’에 라임과 달걀흰자 거품을 올린 ‘피스코 사워’는 신맛의 팽팽한 대결 구도를 만들어낸다.
가스파초
」뜨거운 태양 아래 스페인 사람들이 마시는 붉은 주스도 가스파초, 레스토랑에서 접시에 서빙되는 수프도 가스파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시작된 가스파초는 아라비아어로 ‘젖은 빵’이라는 뜻. 스페인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을 때 전승된 요리로 채소 혹은 과일과 마늘, 식초, 레몬을 넣어 갈아 마신다. 여기에 빵 조각을 넣고 되직하게 갈면 수프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식 코스의 애피타이저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별도로 판매하는 곳은 드물다. 도버빌리지에는 토마토로 만든 가스파초가 개별 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건강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신조로 직접 만든 스프레드와 구운 채소, 사워도 빵을 한데 담은 플레이트를 주 메뉴로 하는 이곳의 구색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혜리 대표는 뉴욕의 한 수프 가게에서 우연히 만났던 가스파초를 잊지 못해 메뉴에 올렸다. 도버빌리지의 가스파초는 토마토와 오이를 주재료로 한 냉수프에 바질, 선드라이 토마토와 완두콩, 포카치아 크루통을 올린다. 익숙한 토마토 맛과 시원하고 말끔한 산미가 애피타이저와 피니시로 모두 어울린다. 살구로 만든 오가닉 프루트 비어까지 더하면 완벽한 여름의 맛이 완성된다.
쏨땀 타이, 스지 얌운센
」방콕의 유명한 식당들 중에 ‘포차나’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유독 많다. 포차나는 우리나라의 ‘옥’이나 ‘관’처럼 쓰인다. 노포를 지칭하거나 중국계 이민자들이 만든 태국형 중식당을 가리키기도 한다. 영동포차나는 우리나라에 태국 음식점이 서른 개가 채 안 되던 13년 전 ‘툭툭누들타이’와 ‘소이연남’을 열어 성공적으로 이끈 임동혁 대표의 야심작이다. 태국 현지 스태프가 만든 공간에서 현지인 셰프가 음식을 만드는 것은 물론 날씨와 분위기 따라 바뀌는 음악과 술은 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산미 있는 음식이라면 단연 태국 요리. 임동혁 대표는 태국의 산미를 좋은 의미로 ‘극단적’이라고 말한다. 극치까지 올라가는 신맛이지만 불쾌하지 않게 리프레시하는 힘이 있다고. 태국의 더위를 이기는 이 힘 있는 산미는 라임과 레몬그라스, 타마린드, 톡 쏘는 피시소스로 이루어진다. 여름과 어울리는 쏨땀과 얌운센은 산도 높은 태국 음식의 정석을 보여준다. 쏨땀은 덜 익은 파파야 채 썬 것에 건새우와 토마토, 땅콩 등을 첨가하고 라임즙과 피시소스, 팜슈거로 맛을 낸다. 원래 라오스 국경인 이산 지방에서 시작된 음식으로 게젓이나 생선 젓갈을 넣어 매운맛을 내는 것이 기본이다. 젓갈을 빼고 산미를 높인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방콕식 쏨땀 ‘쏨땀 타이’. 과일과 옥수수 같은 제철 재료를 넣으면 ‘땀폰라마이(폰라마이: 과일)’, ‘쏨땀카오폿(카오폿: 옥수수)’처럼 종류가 무한대로 늘어난다. 제철 재료를 사용해 1-2주마다 메뉴를 바꾸는 영동포차나에서 이번 여름에 먹을 수 있는 쏨땀은 초당옥수수를 넣은 쏨땀이다. 달콤한 헤네시에 강력한 탄산이 특징인 싱하 탄산수를 섞은 헤네시 하이볼과 함께할 것. 얌운센 역시 소스의 재료는 라임즙, 피시스소, 팜슈거가 전부다. 녹두 당면인 운센과 돼지고기, 새우 등의 메인 재료를 넣는데 영동포차나는 스지를 곁들인다. 젤라틴 같은 식감의 차가운 스지와 산미의 만남은 의외로 잘 어울린다. 자갈 느낌의 미네랄티를 지닌 PYCM(피에르 이브 콜랭 모레)의 부르고뉴 블랑과 매치하길 권한다.
관자 세비체
」프렌치 비스트로의 메뉴판에 도드라지는 이름 하나 ‘관자 세비체’. 한남동에서 ‘메종 앙티브’라는 이름으로 6년 동안 자리를 지키기 전 조성범 셰프는 ‘레체 데 티그레’라는 세비체 전문점을 운영했다. 뉴욕에서 요리를 공부하던 때가 마침 페루비안 퀴진이 각광받는(페루의 수도 리마에는 세계적인 레스토랑과 출신 셰프가 여럿 있다.) 시절이었고 서울에 돌아와 그때의 배움과 경험을 풀어낸 것. 지중해를 낀 남부 지방의 이름을 딴 ‘앙티브’라는 레스토랑을 통해 해산물 위주의 프렌치를 선보였던 이력 또한 메뉴판의 비밀과 연관이 있다. 메종 앙티브의 세비체 역시 타이거 밀크에 관자와 새우를 절인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김치와 카레에 변주를 주는 법이 집집마다 다르듯 ‘앙티브 가(家)’의 비기는 퓌레다. 동남아 음식에서 자주 쓰는 재료인 레몬그라스와 레몬, 라임, 당근을 넣어 만든 퓌레에서 다채로운 산미가 뿜어져 나온다. 균형감을 즐기려면 ‘슴슴한’ 슈냉 블랑 품종으로 만든 호주 컬트 와인을 곁들이길 추천한다.
명품모둠물회
」한창 잘되는 일을 방해할 때 ‘초 친다’는 표현을 쓴다. 가뜩이나 신데 초까지 또 친다는 말이 부정형으로 쓰일 만큼 우리나라 음식에서 산미의 지분은 낮다. 싱싱한 해산물과 차가운 온도의 합이 새콤함의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물회는 우리에게 익숙한 산미 있는 음식 중 하나다. 국처럼 흥건한 속초식, 자작하게 비벼 먹는 포항식, 된장과 빙초산을 넣은 제주도식까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바랗의 물회는 포항 스타일. 영덕, 울진, 거제까지 주로 동해안에서 공수한 신선한 해산물을 사용한다. 큼지막한 방짜유기에 가시를 전부 제거한 제철 세꼬시와 전복, 성게, 해삼이 듬뿍 담겨 있고 그 아래에는 소스가 깔려 있다. 비법이라고 말하는 소스는 달지 않고 입안을 상쾌하게 자극하는 신맛의 결정체다. 따로 준비된 얼음을 취향에 맞게 부어 농도를 조절한 다음 밥이나 면을 말아 먹으면 별미다. 함께 제공하는 성게미역국과 스테디셀러 반찬인 가자미 식해와 멸치무침은 응당 술을 부른다. 13년 전부터 해산물과 와인을 함께 판매해온 곳답게 고민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적당한 화이트 와인과 카바,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다. 코르키지 프리라 거나한 한 끼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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