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이라는 장르 – 자기만의 리듬

그림책이라는 장르 – 자기만의 리듬

문화매거진 2024-07-26 13:37:45 신고

[문화매거진=MIA 작가] 하얀 눈 덮개를 들추고 죽음이 할머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날, 할머니는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준비하는 요리가 크리스마스 빵을 위한 반죽이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신을 대면한 할머니에게 당황한 기색은 조금도 없다. 그를 늘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성하지 못한 요리 때문에 할머니는 사신을 곧바로 따라갈 수 없다. 할머니는 갈 길을 재촉하는 사신의 끈질긴 요구를 부드럽게 거절하는 대신, 그에게 달콤한 음식을 하나씩 건넨다. 바로 ‘생의 맛’을.

▲ 안나 마리아고치 글 ,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오후의 소묘
▲ 안나 마리아고치 글 ,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오후의 소묘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는 겉으로 보기에 판형과 구조 등 일반적인 그림책의 형태와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인다. 양쪽 페이지에 글과 그림이 함께 놓여 있으며, 글은 상황 설명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그림은 순간을 포착한 장면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책이 단순히 기성 그림책의 문법을 안전하게만 따라가고 있다는 결론은 섣부르다. 무난해 보이는 구조와 그림, 글의 배치 방식에서 한 가지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바로 글과 그림의 관계다.

글과 그림이라는 두 텍스트는 성격이 꽤 다르지만, 그림책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책에 함께 담긴다는 점에서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글과 그림의 관계는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가장 보편적인 유형은 상호 보완 관계다. 그림은 글이 하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 글은 그림에서 제시하는 많은 요소 중 독자가 더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을 지시하거나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혹은, 글과 그림의 의미를 일부러 대비시켜 독자에게 유머와 재미를 선사하거나, 그림책 주인공은 알아채지 못하는 정보를 독자에게만 보여주는 트릭을 만들기도 한다.

이 그림책의 글과 그림은 언뜻 상호 보완하는 관계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더 자세히 살피면 글과 그림은 각자의 문법에 충실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러니까 글은 글대로 흐르고 그림은 그림대로, 각자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글은 충실히 설명하는 역할에 집중하고 그림은 제 스타일로 구축된 리듬을 따라가는 데 집중할 때, 두 요소가 아주 결정적으로 상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안나 마리아고치 글 ,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오후의 소묘
▲ 안나 마리아고치 글 ,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오후의 소묘


특히 그림은 어떤 면에서 글을 보충하기보다 자기만의 언어를 갖기로 결심한 것 같다. 단적인 예로,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제대로 묘사한 그림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빵 반죽, 건포도 조각, 누가를 만들기 위한 아몬드와 헤이즐넛, 설탕에 졸인 귤, 금빛 팡도르, 핫초코 등 할머니가 사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먹이는 음식 종류는 다양하지만, 이 중에 하나도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음식은 없다. 그나마 음식을 대체할 만한 유일한 대상은 오직 빨간색 동그라미로 보인다. 사신의 몸속에 들어가거나 쌓이고 흩어지는 빨간색 조형을 보며 독자는 희미하게 짐작만 할 뿐이다. ‘빨갛고 동그란 이 형체가 글에 나오는 팡도르일까?’ 정도로 말이다. 

자세한 묘사를 포기한 대신 그림은 제 리듬을 찾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글에서 지칭하는 대상이 그림의 어느 부분이라고 콕 집을 순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그림책은 글과 그림을 대응시키는 행위를 넘어 시각적으로 더 유의미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림의 전략에는 어떤 의도가 선행했을 것이다. 문자로 표현하면 ‘그림을, 어느 부분은 글과 상관없이 그려 볼까?’ 정도였을. 이 결정에 의해 그림은 한 번, 글로부터 독립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다음부터는 그림의 무대에서 이야기는 둥근 조형의 언어를 따라간다. 작고 가벼운 빨간색 동그라미는 튀어 오르거나, 쌓이고 모이고 흩어진다. 양쪽 페이지를 한가득 메우기도 한다. 이렇듯 그림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 ‘그림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이건 글쓰기로는 의도할 수 없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책의 그림이, 마치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 낼 힌트를 이야기에서 찾은 이후, 마음껏 연주한 방식으로 그려진 결과에 가깝게 느껴졌다. 

단순한 표현을 지향하는 그림의 의도도 돋보인다. 우선 등장인물은 단 두 명이다, 바로 빨간 두건을 쓴 할머니와 검은 망토를 두른 죽음의 사신. 사용된 색 또한 빨간색과 검은색 두 가지뿐이다. 색이 사용된 면적은 넓지 않으며 색연필의 강약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 두드러진다. 힘을 빼고 부드럽게 쌓아 올린 드로잉의 느낌이 그림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반적인 질감은 빨갛고 작은 조형이 응축되고 퍼지는 레이아웃이 힘 있게 묘사된 후반 장면, 즉 클라이맥스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더라도 점진적인 장면을 진행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림책에서 볼 수 있는 묘미인 것이다.

이 그림책에서는 특히 캐릭터 설정이 이야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죽음이 강인한 성격이었다면, 혹은 할머니가 유약한 성격이었다면 ‘끝내 자신의 손으로 할머니를 데려갈 수 없었던 죽음을 이끄는 것은 결국 할머니였다’는 반전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캐릭터 사이의 힘의 균형이 깨지며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 ‘다정한 죽음’이라는 주제가 명확히 모습을 드러내고, 이러한 결말은 그림의 리듬과 함께하며 독자는 한바탕 그림책 춤이 막을 내리는 기분에 잠긴다.

Copyright ⓒ 문화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